오래된 글
허세/과격/미숙함 주의
산다는 것은 늘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의 연속인 것 같다. 내가 하나님을 믿기에, 내게 이런 의미부여는 참 진지한 활동이고 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는 또 다른 무게로 다가오는 것 같다.
나는 늘 의미를 부여하고 살았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말 견디기 힘든 일들도 살다 보면 꼭 만나게 된다. 그럴 때는 반드시 의미를 부여해야 되더군.
하지만, 요즘 드는 생각은 '반드시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는 것이다. 내가 하루하루 사는 삶은 물론, 하나님께서 나를 연단시켜가는 과정의 일부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밑에 깔고 지내는 것 하고, 조금 힘들 때마다 '이건 연단이야!' 되뇌이면서 사는 것은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산다는 것은 인격적 활동이라는 말에 대해 요즘 많은 묵상을 하고 있다. 내가 나의 삶의 모든 국면에 이름표를 붙이는 것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나의 삶을 객체화 시켜 이해한다는 징표가 아닐까... 나의 삶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그와 진정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닐까 - 내 삶의 의미를 부여하기 보다는 거기에 이미 있는 의미를 찾아가는 것...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말은, 그리고 내게 '좋게 보이는' 의미를 만들어 부여하는 것은 '내 삶은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라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의미를 찾아간다는 것은 '내 삶은 참 신비하다!'라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그래, 삶의 신비... 내가 지금 무척이나 젊기에, 그리고 뭐든지 하면 다 이룰 것 같은 왕성한 혈기가 있기에, 세미하게 느껴지는 삶의 신비를 그저 지나쳐 버리는 것 같다. 그리고 드러나는 어떠함들에 매몰되어 깊이 간직되어 있는 그 신비를 보기가 참 힘든 것 같다. 우리 시대는 너무 요란하다, 분주하다.
내가 내 삶을 기계 움직이듯 조작할 수 없기에, 그리고 거기에 함부로 이름표를 갖다 붙이는 것이 얼마나 삶에 대한 모욕인가를 깨달았기에, 그저 엎드리고 싶다. 그리고 내게 허락하신 여러가지 것들을 분석하기 보다는 묵상하고 싶다...
내게 좋은 일이 생기는 것도 신비요,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도 신비다. 좋은 일은 '복', 안 좋은 일은 '연단'이라고 그저 이름을 부여하기에는 각각의 국면들이 너무 깊다... 나는 거기서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남을 보고 싶다. 내가 갖다 붙인 이름이 아닌...
오, 보이지 않은 세계여, 우리는 그대를 보노라
오, 만질 수 없는 세계여, 우리가 그대를 만지노라
오, 알 수 없는 세계여, 우리는 그대를 아노라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여, 우리는 그대를 단단히 붙잡노라.
- John Scotus Eriugena -
이 글에 대한 부연(2002년도)입니다...
이제는 삶의 신비에 대해 많이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에구, 너도 드뎌 나이 먹은 티를 내는구나...' 뭐 이럴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의 자유로움입니다... '신비롭다'는 것은 끌린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까지 스스로 삶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하고 살았었습니다. 근데,,, 사실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저 글을 쓴 후부터 아주아주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삶에 매혹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나 누군가에게 혹은 어떤 것이게 매혹되어 삽니다. 삶의 원동력이라는 것은 이 매혹됨에 충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도, 혹은 어떤 것이게도 매혹되지 않은 삶을 우리는 일러, '무기력하다'고 합니다. '매혹되어 있다'는 것은 매어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혹되어 있는 대상에게만 매어있고 나머지 모든 것에 대해 자유롭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국경도, 계급도 그 어떤 것도 초월합니다. (예수 믿는 삶은 간단하게 말해서, 그리스도께 매혹된 삶, 그분을 사랑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의 '매혹'은 자신의 탐심을 바탕으로 하는 매혹과 다른 매혹입니다. 다른 어떤 것을 위해 그리스도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만을 바라는 것입니다...)
삶에 대한 매혹이 삶 자체에 대한 매혹으로 끝난다면 그건 그저 낭만적인 삶일 뿐입니다.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살듯 삶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뜻 보면 참 신비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끔찍하기도 합니다... 삶 자체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영원성의 맥락에서 볼때, 노자가 "天長地舊"라고 할 때 천지의 영원함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삶과 자연에 끝이 있다면 저는 그것들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에 인격성을 부여한다고 해서 삶 자체가 인격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 이건 사실 회피하고 싶은 결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명백한 사실입니다... 신비적인 삶과 사귀는 것으로 진짜 인격체들과 사귀는 것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삶은 독립되어 있는 인격이 아니었습니다. '인격체인 삶'은 제 가운데 있던 일종의 허상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는 이러한 신비함을 넘어 진짜 인격체들 -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과의 사귐이 깊어져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격체를 사랑하는 것은 '몸(body)'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실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육신과 영혼을 지닌, 피가 뛰고 숨을 쉬는 몸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사랑함은 육신을 지닌 이웃을 사랑함으로 표현됩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은 같이 갑니다...
이제는 붕 떠있던 신비를 넘어 '몸'의 영역으로, 실체들의 영역으로 나아가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