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라는 것은 정확성, 다른 말로 하면 ‘진리’의 차원을 건드린다. 자유라는 것을 선택의 자유로 한정지어 본다면, 기계의 출현은 적어도 선택의 자유, 임의성을 대체한다. ‘인간의 선택은 더 나은 것을 지향한다’는 것을 공리로 삼는다면 ‘더 나은 것을 선택하기’는 선택의 자유에서 결과적 ‘필연’이 되고 이는 일종의 결정론을 형성한다.
그러므로 ‘불변의’ 진리의 영역이 테크놀로지(기계)를 통해 형성된다. 이전까지 그저 선택으로 현실화된 많은 현실들이 이제 ‘버추얼’한 것으로 바뀌고, 이 버추얼한 것은 현실화되기 이전에 이미 진리의 영역, 이데아의 영역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제 테크놀로지가 담론을 대체할 것이고 테크놀로지가 율법이 될 것이다. 모든 담론과 율법의 대의명분은 일차적으로는 생존이며 이차적으로는 번영인데, 이는 테크놀로지(기계)의 대의명분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진리 위의 진리는 ‘좋음’, 즉 선의 이데아다. 기존 형이상학의 영역이 이제 정보화를 통해 물질화와의 거리, 현실화와의 거리가 매우 짧아지거나 사라졌다. 궁극의 목표는 이 거리가 사라지는 것이다. 버추앨러티와 리앨러티의 완벽한 일치, 버추앨러티에 완전히 포개지는, 더 나아가서는 흡수되는 리앨러티, 이것이 바로 기계화의 궁극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계는 자립적일까? 즉, 선택의 자유, 의지가 있을까? 없다. 기계의 ‘소유자’, 즉 주인이 존재한다. 그리고 기계라는 율법이 기획하는 버추앨러티는 이제 기계 소유자의 리앨러티에 복무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사실,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세상 주관자들’은 방법을 바꾸어 세상을 주관한다. ‘공중’에는 여전히 ‘임의대로’ 선택할 수 있는 권세를 잡은 자들이 존재한다. 그들 아래 이제 율법으로서의 테크놀로지가 놓이게 된다. 강력한 율법을 획득하는 것은 종교적 힘(산헤드린)이나 정치적 힘(로마제국)으로 가능했는데, 이제 하나 더 추가된 것이 바로 테크놀로지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