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하기로는 겸손, 감사, 헌신이다.
요즘에는 영성(靈性, spitituality)이라는 말이 보편화되어 있는데, 적어도 기독교 신앙에는 경건(敬虔, ευσεβεια, pietas)이 훨씬 부합한다. 그 기본 뜻은 헬라어든 라틴어든 부모 혹은 신에 대한 공경이다. 한국적 틀로 번역해 보면 이는 효(孝)나 충(忠)과 겹친다. 영성이라는 말에는 그 자체로는 인격적인 관계에 대한 함의가 없으나 경건에는 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어떤 궁극의 영적 존재가 아니라, 인격 같은 것이 있는 존재, 구체적으로는 아버지로 만나는 것이다. 즉, 기독교 신앙에서 궁극이라고 해 봐야 ‘아버지 하나님’을 만나는 것 이상일 수 없다.1) 물론, 기독교 전통에도 인격적인 신을 넘어선 신을 궁극으로 여기는 전통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는 개인적 체험을 용인하는 정도의 허락이지, 공교회적인 신앙고백의 수준으로 올라온 적이 결코 없다. ‘나는 천지가 흘러나온 일자(一者)를 믿사오며’ 운운하는 공교회적 신앙고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독교 경건은 그 핵심이 하나님에 대한 자세(姿勢), 이웃에 대한 자세이다. ‘~께 대하여 행하는 것’이 경건이다.
겸손은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coram Deo] 서 있는 내 자리를 규정하는 개념이다. 하나님은 내게 빚진 것이 없으신 분이시며, 나는 하나님께 보탤 것이 없는 자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오히려 나는 홀로 하나님 앞에 나서려 한다면 죄인인데,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용납하시고 받으신다. 오직 은혜가 이 자리를 지배한다. 그리고 이 은혜가 나의 생명, 의로움, 진리다. 나만 이 자리에 들어선 게 아니다. 나와 함께 많은 사람이 이 자리에 서 있다. 나나 그들이나 모두 은혜를 입었으니 나나 그들 서로가 절대적인 의미로 어떤 우위를 주장할 수 없다.
감사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께 거는 처음 말이다. 하나님은 은혜의 이 자리를 말씀(약속, 언약)으로 마련하셨다. 내가 일하여 얻거나 내가 도와서 된 일이 아니다. 이미 창세 전에 이 자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마련되어 있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거신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우리는 이 자리에 이르렀다. 이 자리에 이르러 우리가 맨 처음 하나님께 말하는 말이 바로 감사다. 처음일 뿐 아니라 마지막이고, 하나님께 거는 모든 말은 궁극적으로는 감사일 수밖에 없다. 내 탄식, 찬송, 요구의 말조차 모두 감사다.
이렇게 감사할 수 있다면 내게 있는 모든 것은 ‘받은 것’이다. 받았으니 또 내놓을 수 있다. 나를 내놓는 것, 이것이 헌신이다. 물론, 이 ‘나’에는 내게 있는 것이 모두 포함된다. 이는 자기 삶이나 소유를 무작정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내놓을 수 있는 만큼을 내놓는 것이다. 나만 내놓는 것이 아니다. 내 형제자매도 내놓는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내놓은 ‘선물’과 은혜가 되는 것이다. 나와 내 형제자매는 모두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 그렇게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은 왔다 갔다 하게 된다.
-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사람의 방식으로 ‘남성’이라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아내/어머니’ 없이도 낳으실 수 있음을 우선적으로 의미한다. 하나님은 아버지로 불리시지만, 여성적/모성적 특징도 당연히 갖고 계신다. 가장 전면에 드러나는 게 하나님의 ‘긍휼’이다. 개역성경이 긍휼로 번역한 단어는 히브리어로는 ‘모태/자궁’을 뜻한다. 하나님의 생명은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는” 생명이다(히 7:3). 하나님은 아버지로 나타나심으로써 아버지도, 어머니도 생명의 근원이 될 수 없음을 확정하신다. 이로써 모든 부성 혹은 모성에 대한 신화와 경배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