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육신 안에서 죄를 정죄하사)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그중 한 분은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기사가 연이어 뜬다.
보니까 요즘에는 제대로 된 학생 지도를 하는 게 불가능에 가까운 듯하다. ‘지도(指導)’, 영어로 하면 ‘discipline’인데, 이는 ‘가리켜(指) 기준으로 삼을 모종의 율법[νόμος]’을 전제하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이 말인즉슨, 지도에는 강도가 세든, 약하든 반드시 ‘정죄’가 따른다는 뜻이다. 즉, 지도를 받는 사람은 훈계 내지는 개선이 필요한 ‘죄인’으로1) 나타난다.
성경이 말하는 바 첫 사람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약하지만, 한편으로는 염소처럼 힘이 세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조차 리워야단 같고 베헤못 같은 사람의 완악함을 이길 수 없다. 모세를 통해 정죄의 직분으로서 주어진 율법은(고후 3:9) 바리새인들이 나타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첫 사람 아담의 육신이 정죄의 직분을 맡은 율법을 이기고, 오히려 다름 아닌 이 율법으로써 자신을 ‘의인(義人)’으로 나타나게 한 것이다. 예를 들면,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버젓이 있는데,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서도 이 계명의 정죄를 피하고 의로움을 유지하는 육신들이 등장한 것이다.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막 7:11).”
내 새끼는 절대로 정죄당해서도 안 되고 죄인으로 나타나서는 안 된다(=기죽이면 안 된다)는 육신의 완악함은 올바르고 정당한 율법을 이기고 자랑한다. 예전에는 소수의 특권층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었던 ‘육신의 바리새적 승리’는 율법을 무력화할 수 있는 수단의 대중화로 말미암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교칙이나 전통적인 교권이라는 율법보다 더욱 거룩하고 의로운 율법의 체계를 ‘칼’(롬 13:4)이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새끼는 금쪽이’ 계명, 학생인권조례, 아동복지법 등이 바로 그것이다(진상과 쟁송의 일상화). 물론, 이들 역시 그 자체로 보면 거룩하고 선하고 의롭다.2) 그러나 거룩하고 의로운 그것으로 말미암아 육신의 완악함(=죄, 롬 7:20)이 율법의 정죄를 이긴다.
그렇다면 체벌을 빌미로 학생들을 폭행하고 인격을 모독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지내던 ‘야만의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 답인가? 이 또한 그렇지 않다. 결국 ‘칼’은 중간 어디쯤을 정해서 결단(決斷)해야겠지만, 사람의 완악함은 율법으로는, 다른 말로 하면 ‘거룩하고 선하고 의로운 계명’으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싸움과 다툼과 전쟁은 ‘선과 악’ 사이의 대결이 아니라 ‘선과 선’ 사이의 대결이다. 모두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 간 심판하여 자기를 선하고 의롭다고 여긴다. 어느 누구도 자신 그리고 자기가 속한 쪽을 악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누구나 자기 눈에 보기에 거룩하고 선하고 의로운 계명을 붙들고 있고, 이렇게 붙들고 있는 것 자체가 자신의 거룩함, 선함, 의로움을 보장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실천적 측면에서 기독교 영성의 핵심은 복잡하지 않고 간결하다. 선악과 열매를 먹었음을 시인하고 그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쪽으로 몸과 마음을 정렬하는 것이다. 이를 한 마디로 하면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사는 것이다.
(시 40:4)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잠 29:23)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큰 슬픔을 당하신 분들을 위해 잠시 기도한다. 안타까운 사실은, 신앙의 핵심에 이러한 육신의 완악함에 대한 근본적인 경고를 내장하고 있는 기독 신앙이 전해진 지 백 년이 넘었는데도 한국 사회를 미시적인 수준에서 변화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남들보다 높은 데서 내려다보는 쾌락(=하나님 같이 됨)을 추구하고 결코 죄인 되지 않으려는 완악함을 부여잡고 있는 상황은, 사회 곳곳에 기독교인들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3) 더욱 심화되었다. 우리는 오히려 예수님의 복음조차 자기 의(義)를 위해 이용하는 무리가 돼버린 게 아닐까, 우리는 일곱 배나 더 악한 세대가 아닐까? 몸은 멀리 있지만 참으로 마음이 무겁고 두렵다.
덧붙임> 네덜란드에서 아이들 학교를 보내 보니, 큰 불만 없이 만족스럽다. 물론, 한국에서의 내 학창 시절 분위기와는 많이 다르지만, 적어도 학교는 교칙에 따라 굴러가고, 교사에게는 권위가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물론, 여기도 턱도 없이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들도 있고, 그래서 어떤 교사들은 힘들어하고, 심지어 가끔은 그만두는 교사가 생기기도 하고, 또 교사가 인기 있는 직업이 아니라서 충원이 잘 되지 않을 때도 있지만, 지금 한국에서 들려오는 소식과는 분명 거리가 있다. 단적인 예로, 여기서는 소위 ‘현장 체험/학습’ 명목으로 아이들을 학부모 임의로 결석 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휴가라면 한국 사람들보다 더 환장하는 네덜란드 사람들이지만, 방학 외 법정 등교일에는 질병 등의 불가피한 이유 말고는 ‘반드시’ 아이들을 등교 시켜야 한다. 이거 정말 칼 같이 한다. 기본적으로 ‘아무리 부모가 동행해도 교사의 교육보다는 공교육의 목표를 더 잘 달성할 수 없다’는 암묵적인 전제가 깔려있는 것이다. 교사의 전문성에 대한 권위와 존중을 기본으로 깔고 있다. 그외의 사안에도 이 정도의 원칙과 그에 대한 강도를 고수하고, 큰 무리 없이 잘 굴러가고 있다.
나는 네덜란드 사람들보다 한국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훨씬 똑똑하고, 빠릿빠릿하다고 생각하는데, 사회 돌아가는 걸 보면 여전히 한국이 네덜란드보다 뒤쳐진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ㅠㅠ 물론, 한국이 ‘하이테크놀로지’ 영역에서는 이미 네덜란드를 저만치 앞질렀다. 모르긴 몰라도, 한국의 학교 시설이 네덜란드보다 훨씬 더 좋을 것이다. 사회 전반적으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회의 룰을 조직하고 운영하고, 두루 통할 만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실력은 (이상하게) 한국이 여기보다 많이 못하다. 예전 표현으로는 ‘민도’라고 하는데, 이게 아직도 네덜란드가 더 낫다.
이런 상황의 원인을 개인적으로는 ‘신뢰도’ 차이라고 본다. 한국은 네덜란드에 비하면 정말 정말 저신뢰 사회다. 기본적으로 서로 불신하고 이기적이다(지금 나는 욕하는 게 아니라 중립적으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명예를 모른다. 그러니 시스템을 구축해놓으면 빈틈을 금방 찾아내서 우회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게 생기고, 그렇게 하면서도 스스로 아무 수치도, 고통도 느끼지 않는다. 자신이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이) 평가하는 자기 이름에 대한 가치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들키지 않았으면 오히려 좋아한다. 그러니 어떤 시스템 구상도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아예 시행조차 되지 않을 때가 많다. 명예라는 것은 건전한 자존감에서 비롯되는데, 한국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명예를 모르고 돈돈 거리면서 모든 것을 경제력으로 환원하는 것은 한국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자존감이 결여되어 있다는 증거일 게다. 경제력이 상위권에 속하여 돈돈 거리지 않아도 될 만한 사람들조차 그러하다.
- 이 말은 물론, 지도를 받는 모든 사람이 심각한 법적·도덕적 과오를 저질렀다는 의미는 아니다. ↖︎
- 사람들의 기림을 받는 계명과 율법에는 모두 ‘일리(一理)’가 존재한다. 내 자식을 금쪽 같이 여기는 것, 학생의 인권을 보호하는 것 등은 모두 그 자체로 결코 악하거나 범죄가 아니다. 오히려 선하고 의롭다. 예전에 부부싸움 같은 자기 스트레스를 학생들의 몸을 두들기면서 풀던 ‘휴먼 트래쉬’들 때문에 여러 법들이 생긴 것 같은데, 이를 오용하는 사람들 때문에 이제는 애꿎은 젊은 교사들이 욕보고 있다. ↖︎
- 아니, 차라리 ‘적지 않기 때문에’인가? ㅠ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