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다. 교회로 모이는 것 그 자체이다.
불교는 ‘개인’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좀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자기 마음에 생기는 것을 해체하는/소멸 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개인이 아니라 남을 용납하는 것이 중심이 된다. 나도 내 생긴 대로, 남도 남 생긴 대로 행동하지만, 서로 용납해주는 것, 이게 굳이 ‘수행’이라 이름한다면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검열 혹은 타인 검열이 아니라, 자기도, 타인도 생긴 그대로 용납해주는 마음을 기르는 것. 그러다 보면 자기 모난 것이 좀 치유도 될 수 있는 것이다. 분노 등이 ‘실체(自性)가 없다’고 처방하는 게 아니라, 실체가 있지만(없어도 상관 없다) ‘현상(現象) 그 자체’에 집중하여 현상 그 자체를 용납해주는 것, 이게 기독교 수행의 핵심이다.
불교의 수행법을 택하는 데 최적 상태는 ‘출가’다. 내외의 연을 끊어야 이상적인 수행의 장을 설정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것을 권하지 않는다. 수도원 전통이 있긴 하나, 이것은 신약성경의 풍경과 많이 다르다. 오히려 기독교 수행은 삶을 현상 그 자체로 받아들이며, 현상을 통해 인내를 연습한다. 소멸이 아니라 ‘인내’ 이것이 기독교 수행의 핵심이다. 그리고 인내의 근거는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음이다. 즉, 은혜에 터하고 있다.
현상을 ‘소멸’ 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상(육체)이 ‘되는’ 게(성육신) 하나님의 해법이다. 즉, 긍휼과 체휼이다. 신성(神性)의 요체(要諦)는 사랑(은혜, 긍휼)인데, 이것은 오래 참으심에서 가장 확실하게 드러난다. 오래 참음과 인내는 현상의 실체(實體) 혹은 자성(自性)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나에게 현상 같아 보이는 것조차 실체 내지는 자성으로 인정하고 대하는 것이다. 이게 기독교적 동정(同情)이다. 수행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로 모이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닮아가고 연습하는 것이다.
(골 2: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벧전 3: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그러나 위의 이야기는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음’을 수용한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다. 이것도 일종의 해체/소멸인데, 불교적 맥락과 다른 것은 이렇게 해체/소멸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의도, 업)’으로 말미암아 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먼저, 사람의 완악함, 그리고 그에 기대어 있는 모든 것(현상이라 불리든 본질이라 불리든 상관 없이)을 해체하신다. 다시 말하지만, 이 해체는 ‘깨달음’이 아니라 ‘인내’(와 수용)를 지향한다.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고, 우리는 ‘소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롬 8:24). 바울 사도의 이 언급은 매우 중요한데, 그는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선언하기 때문이다. 즉, 그가 말하는바 믿음은 인내와 연단, 그리고 그에 따른 소망이 포함된 믿음이다. 어떤 드라이하고 차가운 정보[information/data]를 단지 해득(解得)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식 비유를 하자면, 기독교 신앙은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배’가 아니라, 사망/고통의 바다라도 뛰어들 수 있는 ‘몸’이다. 그래서 전자는 ‘제도(濟度, 건너감)’를, 후자는 ‘세례(익사 후 다시 살아남)’를 이야기한다. 심지어 노아의 방주조차 세례로 본다(벧전 3:21). 즉, 방주 안에 있던 모든 생명은 사실상 ‘(홍수의 물 아래서) 한번 죽은 것으로’ 여긴다는 말이다. ‘죽었는데도 살아 있다면 이 생명은 어디서 난 것인가?’ 이게 노아의 방주를 비롯한 성경의 모든 세례의 핵심에 박혀 있는 질문이다.
불교와 기독교의 근본적인 입장차에 대한 내 생각은 이 글을 보라. 해체에 대하여는 거칠기는 하지만 이 글을 보라. 또, 조금 다른 각도의 논의는 이 글과 이 글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