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글
허세/과격/미숙함 주의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시 139:7-10-
이 찬양은 아무나 부를 수 있는 찬양이 아니다. 이른바, 득도의 경지에 오른 자가 부르는 찬양이다. 주문과 찬양은 다르다. 주문은 말을 함으로써, 노래를 함으로써 하나님을 불러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찬양은 하나님이 오셨기에 자연스레 터져나오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찬양을 하고 있다.
득도한 자는 어딜 가나 하나님 손바닥 안이다. 이것을 아는 자가 득도한 자다. 득도는 '어딜 가나 하나님 손바닥 안'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을 수 없다. 우기는 것은 득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긴다고 하나님은 그에게 오시지 않는다. 바락바락 우기는 것을 믿음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일 뿐이다. 우기기가 아니라 진짜 하나님 손바닥 안에서 노는 것, 하나님 품 안에 있는 것,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득도의 경지다.
"주의 앞에서" 살기 위해서는 주님이 어디 계시는지 알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기고 싶은 욕망을 항상 느낀다―"이 친구야, 아, 하나님이 안 계시는 곳이 어딨냐?" 맞다. 그렇다. 백번 지당한 말이다. 그럼, 그대에게 질문한다. 하나님은 똥에도 계시는가? 빌립보서 3장 8절을 고려하며 답하라. 바울 사도는 자신의 모든 것을 똥같이 여긴다고 했는데 말이다. 하나님은 불상 한 가운데도 계시는가? 하나님은 간음하는 남녀 사이에도 계시는가? 등등. 하나님이 무소부재하다고 우기는 것은 그저 우기기 일뿐이다. 하나님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시다. 자기가 계실 자리를 봐두시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을 읽을 때 "삶의 자리[Sitz im Leben]"을 알아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삶의 자리를 완전히 다 파악할 수도 없을뿐더러 사람마다 파악해낸 것도 많이 다르다. 설령 비슷하다 하더라도 삶과 책 사이에 또 엄청난 거리가 있다. 그 사이를 메꾸어 내는 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경우의 수를 허용한다. 그래도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은 삶의 자리를 파악해내는 것이 성경 읽기에서 필수적인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삶을 제외한 텍스트가 가능한가. 아니, 텍스트는 삶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지 않는가…
물론, 삶의 자리를 공부하고 파악하는 것은 매우 도움이 되고 중요한 일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성경은 삶의 자리를 말하는 책이 아니라 "말씀의 자리[der Sitz im Wort]"를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자리, 우리를 위해 마련해 둔 그 자리(요 14:2-3)에 이르는 것이 성경 읽기이다. 우리는 항상 질문하여야 한다―"랍비여, 어디 계시오니까(요 1:38)?" 예수님은 우리에게 항상 "와보라!" 말씀하시고 계시는 분이시다(39절). 예수님과 먹고 마시고 거하는 그곳이 바로 예수님이 계신 곳, 하나님이 계시는 곳, 하늘이 열리는 곳이다(39,51절).
그러므로 예수님과 만난 자, 예수님과 하나된 자만이 시편 139편을 부를 수 있는 득도자다. 말씀 안에서 한 자리를 찾아내는 자, 아니, 하늘로서 열어주시는 한 자리를 보고 끌려 들어가는 자, 침노하는 자만이 하나님 앞에서, 안에서 사는 자이다. 어떤 삶의 자리에서도 찾을 수 없는 그 자리,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야 찾을 수 있는 그 말씀의 자리는 바로 예수님 옆자리다(엡 2:6). 그러므로 말씀이 하늘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로 승천하셨듯, 우리도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못박혀야 승천할 수 있다. 이 말씀의 자리에 참예하는 자, 말씀 안에서 만유를 보는 자가 시편 139편을 부를 수 있다.
"내 주 예수 계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초혼(招魂)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虛空) 중(中)에 헤여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主人)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심중(心中)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붉은 해는 서산(西山) 마루에 걸리웠다.
사슴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山)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 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가히 <제망매가>만큼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을 주는 시라 할 수 있다. 알다시피 이 시제목은 흔히 "초혼"으로 부르는, 전통적 상례의 한 절차인 고복 의식(皐復儀式)에서 빌려왔다. 이 의식은 사람의 죽음이 곧 혼의 떠남이라는 믿음에 근거하여 이미 떠난 혼을 불러들여 죽은 이를 다시 살려내려는 간절한 소망이 의례화된 것으로서, 그 절차는 임종 직후 북쪽을 향해 죽은 사람의 이름을 세 번 부르는 행위가 중심을 이룬다.
부르는 나는 <여기>에 있다. 죽은 이는 <여기>에서 <저기>로 가고 있다. 불러도 대답하지 않기에 주인 없는 이름이다. 주인 없는 이름이라서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다. 그렇기에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다. 여기서 저기로 건너가고 있는 그는 이제 여기서 부여받은 이름을 내려놓고 간다. 그는 가버리고 그 이름만 남았다. 그가 여기서 자기 이름과 함께 있을 때 그는 부르면 대답하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 되어버렸다. 그의 이름은 여기에 여전히 남아있지만, 그 이름은 이제 주인 없는 이름이다.
가버린 그는 내가 너무나 절절이 사랑하던 사람이다.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불렀어야 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사랑한다." 말 한 마디 못하고 그를 보내 버렸다. 그의 삶을 통하여 나의 삶을 확인하는 그 한 마디를 나는 끝끝내 하지 못하고 말았다. 사랑하던 사람아… 그의 이름은 지금 여기에 있지만, 내 입 속 그리고 내가 서 있는 여기, 이 공간을 메아리쳐 돌지만, 그와 나는 하늘과 땅 사이만큼 멀리 떨어져 있다. 아, 사랑하던 사람아…
나는 그의 이름을 부름으로 그와 하나이고 싶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부르다 내가 죽을 이름이다. 그는 내 삶의 이유이자 근거였는데, 그는 이제 여기 없다. 나는 그의 이름을 부름으로 저기로 가려한다. 타는 그리움으로 부르는 그의 이름은 그러므로 나를 저기로 몰아내고 내가 있는 여기를 삶의 곳이 아니라 죽음의 곳으로 정한다. 내가 내 생명이 아니라 그가 내 생명이었다. 그가 이름만 남기고 저기로 가버렸기에 여기 홀로 남은 나는 죽음을 겪어야 한다.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 * *
아, 부르다 내가 죽을 이름은 무엇인가.
누구나 언제나 어떤 이름을 부르고 있다. 그 이름에는 내 삶의 근거와 근원적 욕망이 농축되어있다. 그 이름을 부름으로 나는 나의 삶의 이유를 체험하고 충만히 경험한다. 그 이름이 있는 곳이 바로 내 생명이 있는 곳이다. 그 자리, 그곳은 도대체 어디인가.
누구에게나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선이 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여기"를 삶의 터전이라고 생각한다. 타는 목마름으로 부르는 모든 이름은 여기에 있다. 여기를 넘어서는 저기, 여기의 끝자락에서 만나는 저기, 우리는 이 저기를 "죽음"이라 한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하게 된다―"주님, 그럼 당신은 도대체 어디 계시오니까?"
주님은 저기 계신가? 우리는 <죽어서> 천국 가는가? 만약, 여기를 기준으로 도출해낸 저기를 죽음으로 여기고 죽어서 가는 곳을 천국이라 한다면, 그래서 저기와 여기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만유를 여기로 만들려는 와중에 있다면, 주님은 저기 계시지 않는다.
그럼, 주님은 여기 계신가? 우리는 <지금, 이 곳에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해야 하는가? 만약, 저기 같아 보이는 여기를 정말 여기 같아 보이도록 하기 위해 주님을 여기 두려 한다면 주님은 여길 떠나신다. 주님은 여기 계시지 않는다.
그럼, 여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니고 도대체 어디 계신가 말인가. 주님의 이름은 그렇다면, 여기에도 없는 이름이고 저기에도 없는 이름, 내가 부를 수 없는 이름이란 말인가?
그렇다. 주님은 우리가 부를 수 없는 이름이다. 내 말 밖에 있는 이름, 피조물의 모든 외침과 부름 밖에 있는 이름이 주님의 이름이다. 모든 것 위에 계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모든 것 안으로 오신 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 저기서 선지자들이 불러왔던 "여호와", 그 이름이 여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체로 나타났다. 하나님이 먼저 당신을 소개하셨기에 하늘로서 피조계를 뚫고 들어온 그 이름을 우리는 부를 수 있고, 그 육체를 우리는 보고 만질 수 있다.
내가 여기라고 생각하는 모든 곳들을 저기, 곧 죄와 죽음의 자리로 규정해내고 여기에 있다 생각되는 모든 이름들을 헛된 것으로 알 수 있어야 주님의 이름을 제대로 부를 수 있다. 주님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는 자가 문 두드리는 주님께 문을 열고 주님과 먹고 마시는 자, 주님과 여기 함께 있는 자다. 오직 주님만이 여기가 되시고 우리의 여기와 저기는 모두 저기가 된다. 주님만이 만유 안에서 만유가 되신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은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다. 그러나 주 안에서 죽는 자, 그는 여기도 저기도 아닌 완전 다른 한 곳에서 다시 태어난다. 사랑하던 그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그 사람과 충만히 함께 거하는 그곳, 만유에 충만한 그곳, 여기도 저기도 삼켜 버리는, 바로 하나님 나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