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2, 2008

강마에와 바리새인

오래된 글

눅 18:9~14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석사를 끝내고 잠시 쉬는 짬에 아내의 권유(?)로 ‘베토벤 바이러스’라는 드라마를 죽 몰아서 봤다. [세상 참 좋아졌다. 이역만리에서 한국 방송을 손가락 클릭 몇 번만으로 볼 수 있다.] 평소에 클래식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던지라 처음에는 좀 심드렁하다가 갈수록 몰입도가 높아졌다. 물론 클래식을 소재로 삼아 전개되었지만 드라마의 내용이 범상치 않았다. 성경, 특히 복음서에서 회화적(繪畵的)으로 묘사하고 있는 율법주의를 아주 ‘드라마틱’하게 재현했다는 게 이 드라마를 보고 난 뒤의 내 ‘결론’이다. 물론 이 결론과 무관하게 드라마 자체에서 난 무지 감동을 먹었다. 아내와 함께 보며 때로는 욱하기도 하고 때로는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즐거웠고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꼈다는 데 대해 드라마 작가를 비롯하여 이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수고한 모든 분들에게 감사한다. 그러나 감동은 감동이고 분별할 것은 분별해야 하지 않겠나. [이하에서는 ‘베바’ 전체의 내용을 대충이라도 안다는 가정 하에 글을 쓴다.]

강마에가 어떤 사람인지는 드라마 중 아무 회나 하나만 골라서 보면 바로 딱 나온다. 그의 됨됨이를 엄청난 독설과 실력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평범한 사람들이 그냥 넘어가고 숨기고 싶어 하는 것을 그는 딱 짚어내어 까발린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칼에 맞아 사람들은 피를 흘리지만 제대로 반격조차 못한다. 왜? 그는 엄청난 실력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강마에가 늘상 강조하는 이 ‘실력’이라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력은 實‘力’, 즉 일종의 힘이다. 강마에의 독설은 강마에의 실력을 기반으로 한다. 그리고 강마에의 실력은 바로 ‘클래식’이라는 절대 세계를 근거로 한다. ‘지휘자’ 강마에는 스스로를 결코 이 절대 세계의 창조자(중 하나)로 내세우지 않는다. 언감생심. 강마에의 집무실에는 드라빔이 있는데 그 중 강마에가 주로 기도하는 우상은 바로 베토벤이다. 그래서인지 강마에의 외모는 강마에 집무실의 베토벤 초상과 닮아있다. 강마에는 이를테면 베토벤이라는 창조주가 창조한 절대 클래식 세계를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고 재현해내는 자다. 이 재현력(再現力)이 바로 강마에가 말하는 실력이다. ‘클래식’ ― 세계의 창조는 이미 끝나있다, 옛일이다. 절대불변의 이 세계를 지금, 여기에 임하게 하는 것이 바로 강마에가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사명이요, 베토벤 제우스가 강마에에게 부여한 소명인 것이다. 이 직분을 확실하고도 완벽하게 이루어냄으로써 강마에는 ‘마에스트로’, 즉 ‘랍비’라 불린다.

랍비 강마에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다. 클래식 세계의 율법을 완벽하게 구현하기에(실력) 그는 정녕 의로우며 쥐뿔도 모르고 까부는 자들을 정녕 멸시할 만하다. 지독하게 교만하지만 그 교만은 진실에 터한다. [드라마는 이런 강마에가 세리같은, 클래식 세계의 율법을 따르자면 죄인인 자들을 받아들여 자기 제자(오케스트라)로 삼는다는 거보(巨步)를 내딛는다.] 강마에의 독설은 그의 이러한 ‘랍비性’을 고려하지 않고 볼 때는 심각한 인신모독일 뿐이다 ― 반드시 뺨을 맞게 되어있다. 그러나 강마에의 그 절대 세계를 공유할 때, 강마에의 재현력 아래 있는 모든 영혼은 강마에 독설을 ‘가라사대’를 앞에다 붙여 듣는다. 클래식의 절대 세계를 훼방하는 모든 육신은 강마에의 말씀으로 정죄당하고 심판된다. 강마에에게는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더 낫다. 강마에에게 지옥은 非클래식이 아니라 似而非클래식이다. 비클래식은 클래식의 존재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이비클래식은 클래식의 존재를 부정한다. 사이비클래식에서 클래식은 ‘클래식’이라는 이름과 껍데기만 남기고 사라진다. 강마에에게는 이 절대 클래식의 세계가 의(義)요, 생명이요, 진리다. 자기 일생(一生)을 팔아 산 보화인 것이다.

마우스필 단원들은 비클래식의 세계에서 클래식 세계를 경모(敬慕)하여 모인 자들이다. 비클래식과 절대 클래식 사이에 사이비클래식이 있다. 이들은 클래식 세계의 율법을 겨우 흉내나 낼 줄 아는, 사이비클래식이라는 불못에 빠지도록 ‘예정되어있는’ 자들이다. 오케스트라에 있어서 단원들(무리=에클레시아)을 제외하고는 ‘오케스트라’는 없다. 단원들이 오케스트라요 오케스트라가 곧 단원들이다. 그러하기에 이들이 지옥불에 들어간다 함은 강마에를 머리로 하는 오케스트라가 타락하여 지옥의 불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강마에가 처음에 마우스필 단원들을 내치려 한 것은 이러한 명료한 진실 때문이다 ― 음악의 시내산에서 반포된 율법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강마에는 ‘본래’ 이 율법에 딱 들어맞는 몸을 가졌는가? 그렇지 않다.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자 하는 자는 항상 율법에 의해 정죄되게 되어있다. 오른눈을 뽑아내고 오른손을 잘라내고… 백체를 끊어낸다 하더라도 클래식이라는 절대불변의 그 진리 안에 딱 들어맞게 담기지 못하고 모자라거나 삐져나온다. 삐져나오는 부분은 자르고 모자라는 부분은 뼈와 살을 깍아 채워 넣어도 그의 몸은 영원히 문둥병으로 흐물거린다. 클래식의 화신(化身)이 되면 될수록 클래식에 의해 정죄당하고 죽임당하여 클래식 밖으로 추방되는 이 역설 ― 오호라 그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그 사망의 몸에서 누가 그를 건져내랴! 그러하기에 그는 평안과 위로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평안과 위로에 삼킨바 될 때, 그의 ‘나’는 속절없이 허물어진다. 클래식의 화신은 마른 풀과 같이 바람에 날아가고 거기엔 오직 진물 흐르는 몸을 부여안고 신음하는 한 초라한 문둥병자만 남을 뿐이다. 두루미는 이러한 강마에에게 평안과 위로를 주는 존재로 등장한다. 강마에가 자기가 보낸 꽃바구니를 발로 밟으며 두루미 앞에서 폭발을 한 것은 바로 문둥병자의 절규이며 두루미 역시 클래식의 화신으로서의 강마에를 선택한다 ― ‘선생님이 무너지는 모습을 더 이상 못 보겠어요!’

교만하고 지독하게 이기적인 강마에가 존숭되는 것은 바로 위와 같은 강마에의 현실 그 자체에 근거한다. 그의 실력 앞에서 사람들은 옷깃을 여미고 그를 ‘마에스트로’, 즉 ‘주인어른’으로 받들어 모신다. 또, 클래식의 율법에 의해 정죄당하여 허물어지고 있는 그에게 동질감과 연민을 느낀다. 거룩한 율법 앞에서 스스로를 부인하며 끊임없이 행함(노력)으로 의를 이루고자 하는 한 인간의 모습은 참으로 숭고하다. 또 그럼에도 그가 평범한 한 인간이라는 사실은 시리도록 처절하며 아름답다. 클래식의 세계에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강마에의 ‘인성(人性)’을 입구로 하여 강마에의 ‘신성(神性)’에 이르고자 한다 ― 강마에의 카리스마적 지도로(대다수 마우스필 단원들 같이), 혹은 강마에와 한 몸이 되어(작은 건우 같이). 그러므로 그에게서 구원을 보는 사람은 그를 숭배하게 되어있다(마치 어릴 적 강마에가 미래의 지휘자 강마에를 보고 구원받은 것처럼). [강마에가 구원자일 수 있는 것은 불못지옥이 예정된 자들을 이끌어 천국 문턱까지 인도할 수 있는 ‘실력’조차 있다는 데 있다. 사이비클래식을 내팽개치고 정통 클래식들만 모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게 아니라, 세리들과 창녀들을 천국 백성으로 만드는 실력조차 있다는 게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드러난다 ― 여기에 이 드라마의 묘미가 있다. 마우스필 단원들을 만나기 전 강마에는 그 실력을 갖추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무지렁이들이 강마에의 신성을 일깨웠다. 참으로 민심이 천심이요, 미륵불은 신음하는 민중이 있어야 도래한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랍비들, 특별히 바리새인들 중 강마에와 같은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바리새인’이라는 이름은 기독교 안에서 욕 비슷하게 쓰이고 있으나 실상 복음서를 자세히 보라. 바리새인들은 아주 강마에스럽다 ― 스스로의 실력에 대한 자신감, 천민들에 대한 경멸, 그러함에도 끝까지 그들을 내팽개치지 않고 ‘이스라엘의 회복’을 타는 목마름으로 갈망함. 그들은 사이비들을 경멸했기에 제사장 가문도 아닌데 제사장에게 해당되는 계명들조차 행했다. 철저한 율법에의 헌신, 이스라엘의 이스라엘다움을 온몸으로 재현하는 것, 이것이 그들의 사명이요 소명이었다.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는 열심이 있었으며 모임에서 항상 상석에 모셔질 정도로 존경을 받았다. [물론 강마에 후임으로 낙하신 타고 온 지휘자 같은 그런 부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랍비들은 분명 강마에스런 면을 가진 자들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복음서의 묘사와 당시의 역사를 살펴보면 말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단순히 강마에 후임 낙하산 지휘자 같은 부류와만 적대했던 것이 아니었다.]

옷깃을 여미게 하고 기꺼이 그 앞에서 종과 개가 되어도 만족스러우리만치 존경스런 바리새인들. 이런 사람들에게 화를 선포하고 불의하다 하신 예수님은 그렇다면 누구신가? 정녕 예수님의 선포에 동의할 수 있는가?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주여 뉘시오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