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08, 2013

SNS와 이데아

스카이프와 카톡 같은 SNS를 경험하며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에 대해 새삼 생각해보다. 좀 왜곡하고 비틀어서.ㅎㅎㅎ

결국 이데아라 함은, 머 지성적 직관 등을 운운하지 않는다면, 어쨌든 '보는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스카이프를 하시며 '요새는 세상이 좋아져서 외국에 있어도 사흘돌이로 손녀들 얼굴 볼 수 있다'며 좋아하시고 어머니는 카톡으로 사진을 띄우고 받으시며 예쁜 손녀들의 커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접하신다. 사진과 영상, 랜선을 타고 넘어온 음성들은 모두 플라톤적 기준으로는 모사들, 모상들이리라. 하지만 약간 흐린 것과 직직 대는 잡음을 신경쓰지 않는다면(그마저도 하드웨어의 성능으로 카바가 된다) 모니터에서 웃고 계시며 말씀하시는 부모님을 우리는 결코 모상, 모사라 할 수 없는 것이다. 플라톤이 카타르시스를 통해 도달하려한, 육체의 방해를 받지 않는 직관의 세계에 우리는 테크놀로지에 의해 도달하고 있다.

육체와 영혼만큼이나 먼 유럽과 한국은 그렇게 합일되고 있다. 철학자가 사랑하여 도달하고자 한 세계와, 마음만 수없이 달려가며 그리워하던, 어느 유학생이 떠나온 고향이, 서로 위상적 지위가 같았음을 우리는 테크놀로지에 의해 새삼 깨닫고 있다. 그러나 외려 손 한 번 뻗어 닿을 수 있는 곳이 육체와 영혼만큼, 유럽과 한국만큼 멀어진 것이기도 하다. 2층 공부방에서 공부하던 내가 1층에 있는 아내에게 카톡으로 말을 걸듯이, 페북 메신저로 이야기하듯이. 소리 한 번 쳐서 서로를 부를 수 있음에도 우리의 말들은 빛의 속도로 미국을 들렀다가 다시 빛의 속도로 우리집으로 달려온다. 지하철에는 빽빽이 사람들이 몸을 맞대고 앉아있지만 저마다 자신들의 이데아들을 향해 저 멀리 소통한다.

우리의 시선이 제아무리 깊고 우리의 시선이 제아무리 높아도 결국 모니터 안일 뿐임이, 우리 영혼 깊숙한 곳에 있던 모니터가 테크놀로지에 의해 밖으로 나오게 되어 드러났다. 결국 가장 깊숙한 화면은 가장 얻기 어려워 보이는 영상이리라. 이미 드러난 것들은 얕은 것으로 치부되고 모니터는 계속 심오해지겠지. 그리고 세상은 더욱 분절되고 더욱 현란해지고 더욱 세밀해지겠지. 백남준 선생의 통찰은 위대하다.

모니터가 박살나기 전에는, 휘장이 찢어지기 전에는 휘장 뒤의 세계는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쪄랴, 나의 망막이 곧 은막(모니터)인 것을! 결국 휘장을 찢고 휘장 너머로 들어가신 분, 거기, 휘장 너머에서 다시 오실 분이라야 휘장 너머 세계의 권세로 세상을 판단하실 것이다.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히 6:20-21)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 1:11)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