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6, 2008

더 좋은 아버지

오래된 글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7~11).

아버지는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려한다. 자기는 좀 못 먹고 못 입어도 자식만은 잘 먹이고 잘 입히고자 하는 게 아비의 마음, 부모의 마음이다.

하나님은 아버지다. 그러하기에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려한다. 좋은 것은 무엇인가? 성령이다. 왜 성령이 좋은 것인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기 때문이다. (성)령, 살리는 것, 즉 생명이 참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자기 자식에게 주고자 하는 떡이요 생선이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다고 나팔을 불고 다니는 자들 중 돌과 뱀을 원하는 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께 돌과 뱀을 얻기 위해 온갖 정성을 바치며 열정을 드린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라’는 것은 이들의 구호요 트레이드마크다. 떡과 생선을 주시고자 하는 아버지 앞에서 이들은 돌과 뱀을 달라고 떼를 쓴다. 아버지는 자기 집에 머물게 하여 입히시고 먹이시길 원하는데 요노무 자식들은 뻑 하면 옷도 안 입고 맨발로 집을 뛰쳐나가 광야로 간다.

언뜻 보기에 광야는 엄청 대단한 내공과 힘이 요구되니까 어른이어야 갈 수 있는 곳이요, 가나안은 안락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운 땅이니까 어린아이의 요람 같은 데라 생각할 수 있다. 근데 희한한 것은, 성경은 광야에서 율법을 받았다고 증거하고 있다.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곳도 광야요, 만나와 메추라기의 은혜로 다독이신 곳도 광야다. 율법(몽학선생)은 아이일 때 필요한 것이고 이후는 유업을 이을 자유자로 어른이 된다. 그렇다면 광야는 아이의 때, 젖과 암죽을 먹을 때요, 가나안은 유업을 받은 때, 단단한 식물을 먹는 어른의 때라 할 수 있다. 구름기둥도 불기둥도 없고 만나와 메추라기도 없고 오직 말씀에 믿음을 화합하여 언약 안에서 거하는 그곳. 물론 본질이야 광야나 가나안이 같다{만나=가나안 소산물=하나님 말씀(으로 말미암은 식물)}. 그러나 가나안은 유업을 받은 자로서 언약 안에서 일함으로 말미암아 소산을 얻을 수 있는 땅인 것이다.

광야에 나서서 수염을 날리며 무공을 연마하는 것은 어른의 표징이 아니다. 아이들이나 그런 놀이를 하고 논다. 해가 저물면 엄마 손에 이끌려 집에 가야 한다. 집에도 안 돌아가고 광야에서 무술놀이나 하고 앉은 어른이 있다면…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광야적 신앙을 ‘믿음 좋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어린아이라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다. 표적과 이적은 아이일 때로 족하다. 광야에서 만나를 주고 메추라기를 주고 애굽에서 독수리 날개로 업어 나온 아버지 하나님. 이런 이적과 기사만을 좋아라하고 있는 것은 어린아이의 믿음이다. 아이는 항상 날 수 있다. 항상 이적과 기사를 체험한다. 하루하루가 기적이다. 아버지의 팔로, 아버지의 등에 업혀서 항상 날아다니고 일을 하지 않아도 양식이 (하늘에서) 뚝뚝 떨어진다.

그러나 이렇게 무동 태워주고 일하지 않은 양식을 먹이는 것이 아버지의 아버지 됨의 궁극이 아니다. 장성하여야 하는데도, 몸은 컸는데도 여전히 아버지 등에 업혀 살려고 한다면 그는 아버지를 힘들게 하는 불효자일 뿐이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사 1:13~14).” 몸이 다 컸는데도, 이제 어른인데도 아이짓을 하면 징계를 당한다. 징계당하면서도 아이로 머무르려 함은, 부모의 가슴에 못을 박는 일이요, 가장 큰 불효다. 아비를 몰라보고 기껏 광야에서 놀아주는 아저씨로, 솜사탕 사주는 물주로 머물러 주길 바라고 항상 자기들을 안고 다니며 둥개둥개 짜릿한 감동을 달라고 조른다. 자기들 말 안 들으면 떼쓰다가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두들겨 팬 뒤 떠나버리는, 패륜아들과 다를 바 없다.

이렇게 자식들을 버릇없이, 규모 없이 키우는 아비가 있긴 하다. 바로 ‘마귀’다(요 8:44). 마귀는 자식들이 하자는 대로 다 해준다. 그러나 아이들의 소망과 기도가 진리일 수는 없다. 아이들의 소원을 진리라 인정해주고 아이들의 말대로 움직이는 아비는 이미 아비 자격을 잃은 자다. 이로써 그의 안에 진리와 생명이 없음이 밝혀진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게 되고 진리를 알게 되는 것이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징계하지 않고 떼쓰는 걸 죄다 들어주는 것은 아이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 8:44).”

세상의 어떤 아비도 참 아비일 수 없다. 육신의 생명을 줄 수는 있으나 참 생명을 줄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아들들이 된 우리는 더 좋은 아버지인,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모시고 있다. 같이 놀아주고 솜사탕을 사주던 아버지를 떠나 배필과 한 몸이 되라. 부모를 떠나야 부모의 사랑을 안다. 아버지는 그저 무동이나 태워주는 놀이동무, 솜사탕이나 사주는 물주가 아니라,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 내 안에서 당신의 형상을 보기 원하는 분임을 놀이동무 아버지, 물주 아버지를 떠날 때 비로소 알게 된다. 불초(不肖)가 가장 큰 불효임을 알아야 한다. 아버지를 떠날 때 아버지를 닮을 길이 열린다. 부모를 떠나는 자, 그가 어른이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주의 길을 준비하라 외쳤다. 그의 외침은 이스라엘의 현주소를 정확히 짚고 있다. 몸은 가나안에 있고 예루살렘에 있지만 영은 어린아이, 유업을 잇지 못하는 종의 형상으로 있음을 갈파한 것이다. 이대로 간다면 하나님이 몸소 그들을 가나안에서 뽑아 광야로 내치실 것이다. 그러하므로 회개하라! 광야부터 다시 시작하라! 인생은 풀이요 들의 꽃 같음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아버지되심)를 새로 깨달아라! 광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