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났는가'를 가지고 동정녀 탄생 등을 반박하는 것은 별 실효가 없다.
일단, 박혁거세 난생 보도를 그저 비웃음거리로, 빈정댈 재료로만 여기는 것 자체가 '계몽된 근대인'으로서의 자의식에서 나오는 교만이다. 고대인들이 몽매하게 정령들과 신들 사이에서만 산 것은 아니었다. 우리로서야 지금 알 길이 없지만, 분명 '난생'이라고밖에 묘사할 수 없는 어떤 특정한 사건이 있었을 것이다. 이것을 그저 비웃는 것은 '해는 동쪽에서 뜬다'라는 일상어를 비웃는 것과 진배 없다. 물론, 엄밀한 과학적 관찰을 토대로 하면 해는 결코 동쪽에서 뜨지 않는다. 지구의 자전에 의해 동쪽에서 보일 뿐이다. 게다가, '뜬다'라는 표현은 지구는 움직이지 않고 해가 움직인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용법이다. 그러나 아무도 이 말을 쓰는 사람을 비웃지 않는다.
나는 분명 '난생'으로 묘사될 어떤 사건이 있었다고 믿는다. 이것은 내가 계몽된 근대인의 자리에 선다 하더라도 굳이 비웃으며 거부할 이유가 없다. 고대인에게는 좀 더 정치된 설명을 할 수단(관찰 및 실험)이 부족했을 뿐이다. 신화의 내적 논리에 의해 난생이 말해진 게 아니라, 난생이라 할 만한 사건들을 해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화적 논리가 생겨난 것이라 나는 본다. 즉, 물질적 현상이 먼저지, 신화적 논리가 먼저가 아니라는 말이다. 당대 물질 수준에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은 카테고리화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런 카테고리 안에서 일정한 수준의 논리적 설명이 뒤따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후에는 어떤 사람을 위대한 사람으로 포장해내기 위해서는 기존 형성된 신화적 설명을 차용했을 것이고. 즉, '알에서 태어났다'고밖에 할 수 없는 어떤 사건에 대한 설명을, 이제 실제로 알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에게도 '난생 출신'이라 구라를 쳐서 그를 위대하게(= 비범하게) 보이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구라들이 존재한다고 해서 난생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일조차 물적 기반이 전혀 없는 것이라는 결론을 곧바로 도출할 수는 없다.
동정녀 탄생 역시 이 말이 의미하는 스펙트럼은 '구라'부터 시작해서 '문자적 보도'까지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사건의 물적 토대에 대한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음이다. 내가 이 사건을 구라가 아니라 문자적 보도라 보기로 선택한 것은 과학적 결론이 아니라 기독교인으로서의 신앙적 결론이다. 난생이나 동정녀 사건이 역사적 근거를 갖는다는 사실과, 신앙적 선택을 하는 것 양자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