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8, 2019

예수님 이전의 착한 이방인들이나 그 이후에 예수님을 알 수 있는 상황이 못 된 사람들은 구원을 못 받나요?

이 질문은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언젠가는 하게 되는 잘문입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해 있는 일이기에 답은 ‘모른다’일 수밖에 없지만 어떤 추론을 만들어볼 수는 있습니다.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나마 가장 직접적으로 성경적인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단, 로마서 말씀대로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 대전제입니다. 그러하기에 모든 사람은 그냥 가만히 두면 영원히 하나님과 떨어져 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스스로 하나님을 선택하여 하나님과 함께 거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겠다고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능력이 없을 뿐더러, 그렇게 하려는 ‘의지’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편에서 나서야 가능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뜻을 내셔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지금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그것은 내게서 비롯된 어떤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은 불공정한 분이 아닌가?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여기에 답변 비슷한 것을 바울의 다음 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롬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롬 9: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롬 9: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롬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롬 9:22)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롬 9: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롬 9: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믿지 않고 살았던 착한 사람들이 ‘지옥’에 갔는지, 아닌지 결정하거나 단언하는 것은 우리일 수 없습니다만, 위 내용을 바탕으로 추론해볼 때, 어쨌든 ‘드러나기로는’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하지 않은 것이라 보입니다. 물론, 위 내용이 ‘복음을 들었지만 완악해진 사람들’에 대한 내용이긴 합니다만, 하나님은 ‘하고자 하시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기도, 완악하게 하시기도 한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는 일에 반드시 포함되는 것은 ‘복음을 듣는 것’이므로, 하나님이 복음을 듣게 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지 않으셨다, 선택하지 않으셨다고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드러내시지 않은’ 하나님의 뜻이 또 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우리가 단지 구원받는 일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수많은 질문들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 자세하게 말을 해놓고 있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 8:21)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마 8:22)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육신적으로 살아있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사람은 ‘죽은 자들’인데/이었는데, 이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것, 이것이 은혜입니다. 죽은 자들의 세상에는 죽은 자들의 일이 있습니다. 우리도 육신을 입고 살기에 해야할 일은 책임있게 하고 도리도 다 하고 하지만,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본질적인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누가 구원을 받았냐, 못 받았냐, 이런 것은 우리의 손을 떠나 있습니다. 자기 한계를 넘어서는 이런 일에서조차 확실성을 확인하고 소유하려는 것은 사망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속한 일, 즉 죽은 자들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집중해야할 것은 ‘지금 내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단계 더 나아가는 이야기를 해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사망의 곤고한 몸 안에 거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하나님 그리고 사람 앞에서 착한 사람으로 드러나기 위해 하는 착한 일 전부는 자기 안에서 역사하는 죄와 사망을 숨기고 덮기 위해, 즉 은폐하기 위해 한 일이라는 판단을 피할 수 없습니다.

제아무리 평생 ‘사심 없이’ 착한 일을 한 사람이라도(그런 사람이 있다고 일단 가정을 한다면) 하나님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결국 사심 없음을 버리고 자기가 예전에 했던 착한 일들을 들고 나와야합니다. 자기가 한 일을 자기 공로로 돌려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소위 ‘착함’이 ‘그 자체로’ 하나님 앞에서도 착함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착함이 얼마나 모여야 하나님 앞에서도 착하다고 인정받는 착함이 될 수 있을까요? 제아무리 착한 사람이라 해도 일생을 착하게만 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착하다, 악하다는 개념 및 판단이 성립되는 것 자체가 이미 인간 내부의 악함을 드러내고 있고, 거기서 나 역시 예외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착한 행실들이 나의 ‘죄악됨’을 대속(代贖)할 수도, 교체(交替)할 수도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착한 일들을 해도 죄와 악에 기우는 내 본성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하지는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