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화 터미네이터 시리즈에 나오는 디스토피아를 별로 믿지 않는다. 인공지능은 결코 스스로 ‘의지’를 가질 만큼 진화하지는 않을 것이다.1) 대신, 인간의 의지를 극한까지 확장하는 방편이 될 것이다. 그 ‘극한’이 어디인지는 여전히 가늠하기 힘들지만 말이다.
인간의 문명이라는 것은 일관되게 인간이 ‘전능한’ 존재가 되는 쪽으로 발달 및 발전을 해왔다. 전능하다는 것은 능력의 다소(多少)가 궁극적인 의제가 아니다. 그것은 항상 상대적일 뿐이다. 전능이 결국 이르고자 하는 곳은 ‘모든 일이 뜻대로 되는 것’, 즉 의지와 행위가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인류가 이제까지 다듬어온 문명, 그중에서도 기계문명, 더 나아가서는 하이테크놀로지라 부를 만한 것들을 통해 이제 인간의 의지는 웬만한 장애물을 다 걷어냈다. 사람이 팔다리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일들 중에서 기계 등을 이용해 하지 못하는 일이 거의 없다. 정신력의 한계조차 기본적으로 거대한 계산기인 컴퓨터를 통해 넘어섰다. 옛날 같으면 손꼽는 천재들이나 할 수 있던 계산을 이제 키보드 몇 번 두드리면 금방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 그야말로 ‘다 이루었다!’ 할 만한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뜻하는 대로 다 이루어지는 세상, 원하는 대로 다 행할 수 있는 세상.
그 마지막 한 걸음을 이제 우리는 딛고 있는 듯하다. 나는 그게 인터넷을 통해 구축된 사이버 현실을 통해 열렸다고 생각한다. 사이버 세상의 실체는 큰 방에 꽉 들어차있는 거대한 ‘서버들’이다. 단 1mm도 움직이지 않지만 쉴 새 없이 빛과 열을 내뿜는 기계장치들이 서로 연결되어 만들어낸 세상이 바로 사이버 세상이다. 그러나 건조하고 심지어는 기괴하기까지 한 이 장비들 속에 지구보다 더 넓은 공간, 시공이 정지된 공간이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사이버 세상 역시 ‘도착 제약’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도착 제약’이라는 말은 (내가 만든 말인데) 어디에 도착하는 데에 넘어야할 시간적, 공간적 제약이다. 내가 여기 네덜란드에서 한국에 가려면 시간으로는 10시간 남짓, 공간으로는 거의 지구 반 바퀴를 돌아야 한다. 이것이 도착 제약이다. 언뜻 생각하기에 사이버 세상은 제약 없는 무한한 공간인 듯하지만, 사이버 세상 역시 도착 제약이 뚜렷하게 존재한다. 이것은 기존 공간들처럼 시공의 제약이 아니다. 사이버 세상에서는 시간의 감각이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오직 디짓들로 확인될 뿐이다. 사이버 세상에서 만나는 것들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는 오직 거기 표시되어있는 숫자들로만 알 수 있다. 시간을 감각하게 해주는 것들, 예를 들면, 닳아있음, 낡아있음, 부서져있음, 이런 것들을 만날 수 없다. 모든 것은 재현되어있는 것이고, 오래된 것들조차 재현이라는 같은 평면에서 존재한다.
사이버 세상의 공항 같은 곳이 바로 검색엔진이다. ‘포털’ 사이트는 문자 그대로 사이버 세상 중 어딘가에 우리를 데려가는데, 그 입구가 바로 ‘검색창’이다. 그러므로 포털 사이트의 골수는 검색창인 것이다. 거기서 클릭을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링크들 역시 검색창을 통해 검색한 결과물들을 미리 뽑아놓은 것들이라 볼 수 있다. 검색창이 없다면 사이버 현실은 통째로 암흑, 더 나아가서는 암전이다.
그런데 검색창이라는 것은 서버를 소유하고 있는 기업이 열어놓은 것이다. 기업이라는 것은 이윤이 최우선임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사이버 세상을 열고 돌리는 테크놀로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력과 자본이 필요하고 인력과 자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광고 수입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검색창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찾게 마련이며, 그곳에 광고들이 집중 게시된다.
이른바 검색 ‘알고리듬’이라는 것은 안내 표지 같은 것이다. 사람들이 가고자 하는 곳, 이르고자 하는 곳에 대한 데이터가 축적되면 검색 알고리듬은 사람들을 그곳으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결국 사람들의 ‘의지’가 알고리듬을 근본적으로 구축하는 것이다. 가장 거대한 인공지능인 검색엔진에 생명을 불어넣고 어느 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인간의 의지다. 키보드를 두드려 사이버 세상에 이르는 행위는 사다리를 가져와서 선반 위의 꿀단지를 내리는 행위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수많은 사다리가 있지만 ‘높은 곳에 이르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를 반영한 사다리의 궁극적인 모양은 정해져 있다. 이 모양을 넘어서면 더 이상 사다리가 아니게 된다. 마찬가지로, 검색창이 궁극적으로 불러올 결과물들도 정해져 있을 것이다. 세부적인 모습이야 어떻게 변하고 또 발달한다 하더라도, 사이버 세상의 한계는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 구체적인 모습이 요 몇 년 새 뚜렷해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서버 안에 구축된 사이버 세상은 책들이 저장되어있는 도서관과 가장 비슷하다. 책들은 사서를 통해 ‘호출’되어 독자에게 읽힌다. 독자는 책속의 세상에 사서를 매개로 입장할 수 있다. 그러나 사서는 독자의 의지와 ‘직접’ 연결되어 있지는 않다. 그는 독자의 말을 듣고 자기 의지로써 독립적으로 판단하여 가장 적합한 책들을 독자에게 가져다준다. 그러나 검색엔진은 모니터 앞에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사람의 의지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 게다가 한 사람의 사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방대한 데이터에 대한 지식과 접근 체계를 구비하고 있다. 그러나 검색엔진 자체에는 ‘자기 의지’가 없다. 근본적으로는 검색엔진을 클릭하는 사람들의 의지와, 그 검색엔진을 최종적으로 컨트롤하는 기업의 의지, 이렇게 두 부류의 의지가 검색엔진의 중추인 것이다.
여기가 바로 미묘한 지점이다. 키보드를 두드려 검색하여 검색 결과를 얻는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필요한 것을 찾았다고 확신한다. 검색을 했는데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면 그것은 그저 검색에 잡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수가 찾았기에 검색 결과 상위에 뜨는 것은 그 자체로 사람들의 신뢰를 획득한다. 그러나 검색 알고리듬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비트’다. 따라서 흑과 백 사이 회색은 기본적으로 배제한다. 회색 지대조차 무한한 비트들로써만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제아무리 미세한 비트라 하더라도 비트와 비트 사이에는 무한한 거리가 존재한다. Yes or no 중 반드시 하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이버 세상에서 나의 의지에 No인 것은 내게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된다. 나는 내 뜻과 구미에 맞는 사이트들만 방문하고 그 사이트에서 표방하는 메시지만 반복해서 듣는다. 그러나 나는 내가 의도하지 않은 사이에 이미 검색엔진을 컨트롤하고 있는 기업의 의지에 종속되어 있다. 신뢰의 척도는 데이터 자체에 있지 않고 데이터가 어디에 그리고 얼마나 있는가가 된다. 즉, 존재가 가치를 대체한다. 정체성과 진영이 좋음과 나쁨, 옳음과 그름의 준거가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페이크’가 되는데, 이 페이크의 정체는 사실은 ‘No’, 더 나아가서는 ‘0’인 것이다. 완전수인 ‘1’로만 충만한 세상이 바야흐로 도래한 것이다. 고대로부터 철학자들이 그렇게나 이르고자 하던 세상이 생겨난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맞다’만 말할 수 있는 충만한 곳. 혹여 1이 아니면 ‘0이다!’ 외치며 레텔을 붙여 쫓아낼 수 있는 곳. 순수한 이데아계에 가까운 현실이 드디어 도래한 것이다.2)
그런데 참 희한하게도 그 이데아계는 알고 보니 ‘부족’이라는 게 밝혀졌다. 성인식을 위해 다른 부족 남자의 머리 가죽을 벗겨 와야 하는 세상, 이것이 바로 사이버 세상의 모양과 형상이다. 법과 윤리 때문에 이미 실물 세계에서는 지나가버린 현실, 그 한계를 넘어선 현실이 사이버 세상이라는 사실이 이제 서서히 뚜렷해지고 있다. 물질과 육체가 거세된 이데아계의 실상이 사실은 거대한 싸움판이었음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물질과 육체가 거세된 이데아계가 알고 보니 ‘인간의 엑기스’였음이 뚜렷해지고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현실의 법과 윤리로 현실의 물질과 육체를 컨트롤하는 것이 곧 사이버 세상을 컨트롤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른바 ‘인생은 실전이다!’ 이는 우리에게 사이버 세상의 정체가 다름 아닌 ‘서버들의 전기적 연결망’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서버들이 스위치 오프 되거나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던 손가락들이 민형사 고소를 통해 사라지고 로그아웃 되면 사이버 세상은 사라져버린다. 서버들이 가끔 다운될 때, 그 찢어진 틈을 비집고 진짜 현실이 우리를 방문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