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에서 중요한 것은 '바람을 잡으려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만물의 헛됨이 인간의 수고와 일함을 허무로 돌리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잡으려' 하는 것은 항상 욕망과 탐심과 결부된다. 즉, '마음'의 문제인 것이다. 만약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헛되다는 것은 괴로움과 연결될 수 없다.
그런데 만물을 허무한 데 굴복하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있다가 없어지는 것은 하나님 명령에 의해 작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은 힘이 아닌데 마치 힘과 권세 같이 작동한다. 사실은 힘이 빠지는 것인데(썩어짐), 오히려 힘처럼 작동한다.
복음의 입장에서 보면, 불교의 연기설은 하나님의 이러한 명령의 변치 않음에 터하고 있다. 여기가 불교의 출발이다. 열반과 연기를 부인하면 이미 불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반과 연기의 확고부동함은 어떤 힘이 썩어짐을 계속 야기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논리적으로는 파르메니데스가 정확하다. 불교가 관하고 있는 진리가 분명 있다. 일체개고는 사람이 마음에 소망하는 것을 끝내는 이루지 못하게 하는 어떤 힘(썩어짐)이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나 사성제는 사람이 사망과 썩어짐과 고(苦)를 명령한 어떤 존재1)를 결코 이길 수 없음을 반증하는 진리다. 사람의 업력은 이것을 이기지 못하고 오히려 심화시키며, 그렇다고 열반이 그 해결책이 될 수도 없다. 그렇게 힘이 작동하게 하신 분이 마련한 둘째 사망 역시 소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열반하고자 하는 중생조차 자기 앞에 불러 세우실 것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창조는 creatio ex nihilo이지 않은가! 그분은 열반한 아라한들조차 다시금 중생으로 복원시켜 깡그리 자기 앞에 불러 세우실 것이다.
- 불교 입장에서는 ‘중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