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여러 가지 일로 한국을 방문하지 못하다가, 무려 11년 만에 방문했다. 엄청나게 바뀌었다고 느끼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생각보다 한국의 변화가 낯설지 않았다. 이는 이제 삶의 일부가 된 인터넷 소통의 영향이 큰 것 같다. 내가 지금 말하는 ‘인터넷 소통’이란, sns를 포함하여, 인터넷으로 언론에 접근할 수 있고, 심지어 비용 없이 한국 가족 및 지인과 소통할 수 있는 상황을 의미한다. 인터넷 소통은 기존 직접 경험과 간접경험 사이 어디쯤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
하여튼, 내 생각에 이제는 한국의 ‘양면성’이 더욱 뚜렷해진 듯하다. 한국은 ‘다이나믹 코리아’라는 기치대로 매우 빨리 변하는 사회이긴 하지만, 그 변화를 추동하는 기저는 거의 변하지 않는다. 이 양면성이 예전보다 더욱 공고해진 듯하다. 내가 ‘기저(基底)’라는 표현을 썼지만, 이 표현의 자의(字義)와는 달리, 보통 한국의 공고한 기저는 소위 ‘윗사람들’이 대표한다. 한국 드라마의 키치 중 하나인 ‘부패하고 고루한 윗사람들과 깨끗하고 참신하고 개혁적인 아랫사람들의 대립’이 이러한 사정을 통속적으로 잘 대변한다.
예전 한국 사회가 이 변화라는 ‘양극’과 변하지 않는 기저라는 ‘음극’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진자의 진폭이 꽤 큰 사회였다면, 이제는 그 진폭이 많이 줄어든 것 같다. 좋은 자리들은 이미 꽉 찼고, 그 자리를 선점한 사람들은 절대로 나오지 않는다. 나오고 들어가는 교체 속도가 빨라야 한국의 역동성이 잘 유지되는데, 들어가서 자리를 차고 앉은 사람들은 나올 생각이 없다. 예전과 많이 달라진 풍경은, 식당마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풍경이었다. 집에서 자기 먹을 것을 싸 오는 사람들이 거의 없고, 그러다 보니 소위 ‘맛집’에만 식사 때마다 사람들이 몰리니 먼저 들어간 사람들이 나올 때까지 줄을 서서 기다린다. 그런데 맛집을 포기하고 조금만 둘러봐도 한산한 식당들이 많이 있는데, 이런 데서 식사하는 것을 스스로 용인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더 나아가서, 집에서 도시락을 싸 오면 비용도 절감되는데(‘밥값’이 나오는 직장은 해당되지 않겠지만), 이런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요즘 거의 없는 듯하다.
나는 한국의 이러한 양면성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던 진자에서 나오던 힘이 한국을 지금의 선진국으로 만든 주요 요인 중 하나라고 본다. 바꿀 수 있는 것은 모두 ‘더 좋은 것으로’ 바꾸려는 힘이 한국을 지금 ‘하이 테크놀로지’ 사회로 만들었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이 무엇인지 규정하고 내면화 시키는 기저는 놀랍도록 바뀌지 않았다. 또, 예전 같으면 그 기저는 주로, 잠재된 것으로, 가능성의 영역으로 여겨졌다면, 이제는 현실화한 것,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예전 같으면 ‘속으로만’ 생각하거나 ‘그랬으면’ 싶은 것으로 여기기만 해서 차마 입으로 꺼내지 못하던 말들도 이제는 거리낌 없이 발화된다. 한국 사람 모두가 일종의 ‘윗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니 빡빡 기면서 한국의 역동성을 담당하던 ‘아랫사람들’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이것은 사회 경제적 평가 이전 자세의 문제, 가치 평가의 문제다.
이상의 썰은 물론, 나에게 드러난 ‘사람들’을 보고 말하는 것이다. 드러나지 않은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사람들, 자기 의사와는 별개로 사회 경제적으로 아랫사람이기만 한 사람들은 여전히 발언권을 못 얻고 있는 듯하다.
모든 것이 ‘현저(顯著)’하게 될 때, 모든 것이 드러나고 숨겨진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될 때 아마도 한국 사회는 정점을 찍고 내려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한국 사람들을. 왜? 한국 사람의 인생경로는 희망과 자부심보다 두려움과 수치에 더 크게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기존 기저를 따라 생성된 희망과 자부심조차 의미 없게 되는 때(=한국이 중진국 이하로 내려갈 때)가 이르겠다 싶으면 한국 역동성의 진자는 다시 진폭이 넓어질 것이며, 다시 많은 것이 숨겨지고 가능성의 영역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한국 사람들은 자기 희망과 자부심을 포기하고 문앞에 바짝 당도한 두려움과 수치를 제거하는 일에 하나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