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네덜란드에서 한국의 소식을 듣는데, 착잡하기 그지없다. 대통령이 탄핵되어 정치적으로 양극화된 상황도 상황이지만, 서로가 ‘가짜뉴스’ 생산자라고 비난하는 현실이 참으로 우려스럽다.
이른바 가짜뉴스[fake news]라는 것은 단지 진위(眞僞)가 아니라 선악(善惡)의 차원으로까지 승격되었다. 진위는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음을 전제한다. 내가 거짓되게 알고 있다면 언제든지 바꿀 수 있음을 또한 전제한다. 그러나 선악은 그렇지 않다. 나는, 내 편은 선이고 내가 비난하는 쪽은 악임을 전제한다. 보통은 이렇게 되기 전에 진위를 평가하는 작업이 뒤따른다. 그래서 내가 판단하기에 진실인 쪽에 선 후 거짓된 쪽을 악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도식이 모호해져 있다.
진위라는 것은 십계명 같은 윤리적 명제나 수학적 물리적 명제가 아니면 항상 맥락을 탄다(심지어 방금 말한 명제도 맥락을 탈 때가 있다). 수사학적(修辭學的)으로 보자면, 맥락을 타지 않거나 덜 타는 명제들은 논거(論據) 내지는 논고(論庫, loci communes)의 역할을 한다. 누구에게 들이밀어도 그 선악을 수긍할 수 있는 것들의 모음이 바로 논고다. 예를 들면, ‘도둑질은 악하다’, ‘남에게 도움을 베푸는 것은 선하다’ 등은 웬만하면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도 ‘보편적으로’, 굳이 진위를 판단받을 필요 없이 바로 수긍된다.
SNS 등을 기반으로 한 소위 ‘소셜 미디어’는 예전 같으면 보편성을 띨 수 없는 것들, 논고로 등록될 수 없는 것들을 보편화하고 논고로 등록하는 작업을 수행한다.1) 이쪽에서는 보편적인 이야기들, 주장들이 저쪽에서는 ‘가짜[fake]’ 내지는 ‘사기[fraud]’가 된다. 사회적으로 합의된 하나의 논고가 사라진 것이다. 예전 논고에서는 저 밑바닥에 있어서 건드리지 않은/못한 명제들, 주장들, 이야기들이 이제 끄집어내어져서 그 보편성을 평가당하고 시험받는다. 그런데 순서가 바뀐다. 자기 선악을 먼저 설정한 후 이를 따라 진위가 결정된다. 합의된 ‘넘지 말아야 할 선’도 사라진다. 이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증상 내지는 표지가 바로 ‘조롱과 분노가 일상화된 상황’이다. 사정이 이러하면, 이른바 ‘레거시’ 미디어의 권위는 흩어질 수밖에 없고, 레거시 미디어 역시 ‘원 오브 에스엔에스’가 될 수밖에 없다. 기존 레거시조차 의심과 회의 아래 놓이기 때문이다.
내 깝냥으로는 전 세계적으로 이러한 사태는 해결될 것 같지 않고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나는 한편으로는 AI가 해결책이 되지 않겠느냐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AI에게 어떤 뉴스 내지는 논설의 정당성 여부를 물으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이 기대도 최근에 철회했다. AI라는 것은 항상 한 발짝 늦게 따라갈 수밖에 없는데, 한 발자국 전까지의 데이터가 이쪽도, 저쪽도 서로 보편이라고 논쟁하는 것이라면 결국 AI는 대부분의 경우에서 양시양비론적 결론을 내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계속 보편성을 인정받는 논고는 자연과학(과 그것처럼 보이는 어떤 무엇) 이론에서 파생된 명제들일 텐데, 이것 말고는 모두 각 개인/그룹의 선택과 의심 아래 둘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큰 문제다. 과학주의에서 파생되는 부작용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고 대비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냉소와 조롱으로 무장한 과학주의자들의 출현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컴컴하고 험악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미네르바의 올빼미 또 한 마리가 언젠가 날아오르겠지. 그때는 또 다른 ‘모던’이 시작되는 때일 것이다. 계몽을 자처하는 그 모던이 무엇을 빛으로, 무엇을 어둠으로 규정할지 우리는 아직 알 수 없다.
- 그 끝판왕이 바로 입법이다. 입법은 강제력까지 장착한 보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