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고신언론사 연재
3회: 거룩한 기록물과 거룩함의 영
이제까지 논한 것을 요약해 봅시다. 먼저, 바울에게서 ‘복음’은 우선 내 구원 체험의 언어가 아니라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거룩한 기록물들’(성경) 안에 미리 약속하신 바, 즉,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약속과 그 성취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은 죽어 사라지지만 그들의 기록은 남아 업데이트와 변개가 불가능한 공적 증언(=유언)이 됩니다. 어떤 육체도 건널 수 없는 사망이라는 심연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그 성취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지자들이 미리 기록한 약속들은 사망을 넘어서지 못하면 성취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약속하시는 분도, 성취하시는 분도 모두 ‘영원히 살아계시는’ 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 사도를 비롯한 신약성경 기자들은 이렇게 선지자를 통해 약속하시고 또 성취하시는 분을 ‘성령’이라고 부릅니다. 성령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고(마 22:43, 행 28:25, 히 3:7, 9:8, 10:15 등), 말씀하신 그 약속들을 이루시는 분 역시 성령이십니다(마 1:18, 3:16, 4:1, 눅 4:14, 행 1:8, 롬 1:4, 히 9:14 등).
바울 사도는 로마서 1:4에서 성령님을 ‘거룩함의’ 영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종종 거룩함을 윤리적 관점에서 이해합니다(성화). 그러나 거룩함의 일차적인 의미는 ‘하나님께 속함’입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인 의미에서 거룩한 존재는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따라서 거룩함은 ‘얼마나 하나님과 닮았는지’로 판가름 납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처럼’ 선하고, 의롭고, 깨끗해야 거룩하다고 불릴 수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모든 악과 불의, 더러움에서 분리되어 존재하십니다. 가장 기본적인 거룩함은 ‘영원히 살아계심’, 즉 ‘영생’입니다. 따라서 거룩함을 두 단어로 요약하면 ‘의로움’과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속된 것’은 ‘죄’와 ‘사망’이라고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거룩함에 대한 이러한 입장은 성경, 특히 신약성경을 관통합니다. 가장 전형적인 구절이 바로 로마서 6:22입니다―“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그러므로 ‘거룩함의’ 영이신 성령님은 ‘의와 생명의’ 영이십니다. 성령님이 하신 말씀은 모두 의롭고, 성령님은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옛적에 말씀하신 성령님의 말씀을 듣고 기록한 선지자들은 죽어서 더 이상 땅에 있지 않지만, 성령님은 살아계셔서 약속들을 응하게 하십니다. 여기서 왜 선지자들이 남긴 기록물이 ‘거룩한’ 기록물(성경)인지가 해명됩니다. ‘거룩함’의 영이신 성령님이 기록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기록물만 ‘하나님께 속한’ 기록물입니다.
이제 다시 한번,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 복음이라는 사실을 떠올려 봅시다. 이 말을 따르자면, 성령님이 선지자들에게 하신 모든 말씀은 성령님이 ‘임의로’ 생각해 낸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말씀은 ‘아들을 약속하신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어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들’을 약속하신 하나님이니, ‘아버지’ 하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신 모든 약속이 응하여 ‘진짜로’ 땅에 아들이 임하셨을 때 이 아들이 ‘기록대로’ 오셨음을 확증하는 분은 누구십니까? 바로 아버지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님입니다. 바울 사도에 따르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들은 1) 육신으로는 다윗의 씨로 나셨고, 2) 거룩함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1), 2) 모두 확증하신 것입니다. 이 확증은 곧 성령을 보내신 아버지의 확증이기도 합니다.
1)을 단지 ‘육체를 입고 사람이 된다’라는 관점에서만 보자면 굳이 성령님이 직접 개입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처럼, 부모를 통해,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 출생하면 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이 되실 때조차 성령님이 약속을 성취하는 방식으로 사람이 되셔야 합니다. 혈과 육, 가문을 이루려는 남편(남자)의 뜻을 따라 태어나도 안 되고, 자녀를 갖고 싶다는 아내(여자)의 뜻을 따라 태어나도 안 됩니다(요 1:13, 히 7:3).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은 ‘다윗의 집(가문)’에는 태어나되(눅 1:69, 2:11), 득남하여 가문을 이어가고자 하는 다윗 가문의 의지와 욕망을 따라 태어나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다윗의 후손은 될 수 있어도 하나님의 아들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단지 신적인 능력으로 태어나셨다고만 의미 부여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예수님의 잉태에서부터 개입하셔서 드러내신 하나님 아들이 태어나는 자리는 다름 아닌 ‘다윗의 집에 태어나지만 혈과 육, 사람의 뜻을 따라 태어나지 않는 자리’입니다.
당시 요셉과 약혼만 하고 동거하기 전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율법 아래서는’ 돌에 맞아 죽는 자리에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부정한 짓을 저지르지도 않았는데 마리아는 잉태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자기가 동거하기 전에 기적적으로 임신하게 해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했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천사는 마라아에게 나타나서 잉태를 알렸지만, 온 세상이 알도록 공표하지는 않았습니다. 잉태한 사실이 밝혀지면 천사의 고지를 듣지 못한 다른 모든 사람은 그녀를 간음한 여자라고 정죄할 것입니다. 이 억울함과 수치는 오롯이 마리아의 몫입니다. 그러니 동거하기 전 잉태한 자리는 마리아에게 어떤 자리였을까요? 사회적으로도, 생물학적으로도 ‘죽을’ 자리입니다.
이 자리는 요셉에게는 어떤 자리입니까? 굳게 믿었던 사람의 배신으로 죽고/죽이고 싶도록 분노하는 자리입니다. 만에 하나, 그가 자기 약혼녀의 말을 믿었다고 하더라도 ‘약혼녀가 동거하기 전 잉태했지만 간음하지는 않았다’라는 말을 세상에 설득할 만한 정황과 논리는 해 아래 존재하지 않습니다. 요셉에게도 이 자리는 ‘죽음’의 자리입니다.
성령님은 요셉과 마리아를 죽음의 자리로 몰아가셨고, 바로 이 자리에서 그들은 예수님의 아버지와 어머니로 나타났습니다. 다음 회에서 더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4회: 사가랴와 엘리사벳, 그리고 요한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나시는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먼저 누가복음 1장을 봅시다. 누가는 여기서 세례 요한의 탄생과 예수님의 탄생을 함께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는 사가랴, 어머니는 엘리사벳입니다. 사가랴는 아론의 후손이고(1:5),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친족입니다(1:36).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아들을 얻지 못하는 자리는 ‘수치’의 자리였습니다. 나중에 엘리사벳은 아들을 잉태한 뒤 이렇게 고백합니다―“주께서 나를 살펴봐 주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수치를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그런데 사가랴가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 때 제비에 뽑혀 성전에 들어가서 분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사가랴에게 천사가 방문하여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이 천사는 ‘향단 우편’에 등장했는데,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기도를 응답하시는 은혜의 자리를 가리킵니다―“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사가랴의 기도 제목은 무엇이었을까요? 정확하게 본문에 나오지는 않으나 문맥을 고려하면, 그는 하나님이 은혜로써 이스라엘 나라를 속히 회복해 주시라고 간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가랴의 마음 더 깊은 곳에는 응답받지 못한 간구가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아들 없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까지도 이들 부부에게 아들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사가랴 부부에게 ‘지금’은, 나이가 많아 아들을 낳기가 가능하지 않은 ‘때’입니다. 이제 이들에게는 소망조차 사치가 되어버렸습니다. ‘죽은 자와 같은’(히 11:12)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육신에는 이 수치를 이길 ‘생명’의 능력, 아들을 낳을 생산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가랴는 레위 지파, 아론 반열, 이스라엘의 제사장이었지만, 아브라함처럼(창 17:17) 자기 아내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내가 이것을 무엇을 따라서 알리이까?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이러한 사가랴의 요구에 대해 가브리엘 천사는 ‘말하지 못하게 됨’을 표적으로 제시했습니다―“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사가랴는 이때부터 말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엘리사벳이 아들을 출산하고 나서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서판에 쓴 뒤에야 다시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한(요하난)’은 ‘여호와는 은혜’라는 뜻입니다. 요한의 태어남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은혜의 표적입니다. 첫째, 그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하나님 앞에 먼저 와서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1:17). 따라서 요한의 태어남은 주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이제 곧 임하심을 확정하는 표적, 임마누엘을 예비하는 표적입니다. 둘째, 아들이 없어서 수치 가운데 지내던 사가랴 부부의 수치를 기쁨으로 바꾸는 표적입니다. 이 두 은혜 모두 육신의 능력으로는 이룰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의와 생명을 내어놓지 못했고,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아들을 낳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태어남은 ‘수치’ 가운데 있던 사가랴 부부가 기쁨으로 나아가는 표적인 동시에, 좌와 사망 아래 있는 이스라엘이 긍휼을 입을 표적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탄생 이야기는 단지 ‘노부부가 기도해서 아들 얻은 사건’을 넘어섭니다. 하나님 은혜에 관한 이야기이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 베푸시는 긍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는 1:67 이하에 나오는 사가랴의 찬송을 보면 잘 확인됩니다―“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이 찬송에서 사가랴가 명확하게 짚는 사실은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베푸실 구원은 이스라엘이 달음질하여 획득한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언약·약속·맹세와 자기가 말씀·약속·맹세하신 바를[엘리사벳] 기억하시고(사가랴)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 신실하심의 능력(가브리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선지자들이 기록해 두었습니다. 육신의 더러움과 죄는 모세 율법을 따라 깨끗하게도 되고 사함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심지어 율법조차 그 목적지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은혜와 긍휼임이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 요한’이라는 표적을 통해 밝히 드러났습니다.
아론의 반열을 따르는 제사장의 제사로는 육신 안에[서] 역사하는 사망을 이길 수 없습니다. 모세 율법으로는 죽은 사람의 몸이 산 사람을 이깁니다. 산 사람이 시체와 접촉하면 시체가 깨끗해지고 살아나는 게 아니라 산 사람이 부정해집니다, 이스라엘의 죄와 허물은 성소를 더럽힙니다. 모든 육신은 사망과 죄와 더러움과 수치 앞에서 ‘할 수 없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육신의 모든 의와 생명이 ‘침묵’하는 자리, 그 ‘때’가 바로 하나님 신실하심(미쁘심)이 은혜와 긍휼로 나타나는 때, ‘요한(여호와 은혜)의 때’입니다.
이제 때가 찼습니다. 때가 차기 전, 이스라엘이 ‘할 수 없다’고 말하기 전 이스라엘이 했다면,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낳을 수 없다’고 말하기 전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낳았다면, 은혜가 은혜 되지 않았고 긍휼이 긍휼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미쁨이 없는데 미쁨 있는 듯 나타났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은혜가 임할 때 맨 먼저 드러나 확정되어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죄와 거역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미쁨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항상 미쁘셔서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십니다(딤후 2:13). 그래서 하나님의 신실하심(미쁘심)은 항상 사람 쪽 미쁘지 않음·거역·불순종을 이기는 은혜와 긍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 그가 …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그렇다면 ‘의인의 슬기’는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은 미쁨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항상 미쁘셔서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음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지혜입니다. [이 지혜만이 육신의 무능한 침묵을 깨고 나오는 첫 마디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