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3, 2002

하나님의 뜻과 감사

오래된 글
허세/과격/미숙함 주의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살전 4:3-

우리는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늘 생각하며 산다. '내가 하는 이 일이 과연 하나님의 뜻에 맞는가', '하나님의 정해놓은 뜻에 어긋나지는 않을까' 등등.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해 놓은 성경구절을 찾아보면, 하나님의 뜻은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종말 그 자체이다. 모든 예정된 자들이 다 주 앞에 모여들어 새 사람들로 완벽하게 드러나는 그것,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지금 우리는 (만약 주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뜻 안에 이미 있고, 뜻을 이루고 있는 것이 된다.

그러면 우리가 시도 때도 없이 고민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은 도무지 무엇인가. 주로 하나님의 뜻은 하나의 '사안'에 관련되어 있다. 즉, 하나의 일, 하나의 사건, 하나의 선택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갖다 붙인다. 일단, 우리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생각한다. "하나님의 뜻은 완벽하게는 몰라도 어느 정도 감 잡을 수 있으며, 되도록 잘 알아서 그대로 행해야 한다." 아니, '그대로 행해야 한다'라기보다는 '그대로 행해야 좋다'라고 표현하는 게 더 좋겠다. 이러한 생각들의 가장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우리의 '고통'의 문제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고통의 유무'로 결정지으려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을 줄이는 것)은 '나의 만족과 유익'과 정확히 동의어이다.

염려는 고통의 문제다. 고통스럽기에 염려한다. 우리는 우리의 염려를 '하나님의 뜻'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포장하기를 즐긴다. 그리고 고통을 줄이는 선택,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 부른다.

(이것은 아주 깊은 차원의 고통이다. 만약, 육체적으로는 고통스럽더라도 다른 쪽에서 쾌락을 주는 결정이라면 그것은 고통을 줄이는 결정이다. 주로 '비장한 것들'은 이러한 류에 속한다. 예를 들면, 비장한 얼굴로 선교사로 헌신하는 등의 예 ^_______^ - 모든 선교사들이 다 그렇다는 건 아니다^^) 우리는 '좀더 나은(=좀더 큰 쾌락을 주는=좀더 덜 고통을 주는)'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 그리고 자기 입맛에 딱 맞는 그런 배우자 후보를 만나는 것, 이런 것들을 배우자 선택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부른다. '좀더 나은' 직장을 선택하는 것, 내 입맛에 맞는 직장을 선택하는 것 등을 직장 선택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부른다. (종종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직장, 배우자 등의 선택이라는 덕목이 등장할 때가 있다. 만약, 자신이 좋은 직장을 버리고 신앙생활 잘 하기 위해 좀더 나쁜 직장을 선택했다면, 그 행위 자체가 이른바, '신앙 좋음'을 드러내므로 쾌락을 준다. 좀더 나빠보이는 직장, 배우자 등을 선택할 때에는 거의 예외없이 이 쾌락을 좇은 선택이다.)

좋은 선택을 하기 위해 끊임없이 염려함으로 우리는 기도한다. 그러나 그 기도는 정확히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 '이방인의 기도'이다. 이방인의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을 보고 우리는 '하나님께 맡긴다'라고 한다. 염려하지 않음은 끊임없이 이방인의 기도를 드림으로 그 (고통의) 문제 자체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의 기도가 필요없는 상태, 고통이 문제가 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족함'은 지금의 고통을 참으면 조만간 하나님이 '더 좋은 것'으로 주시겠지 하며 자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지금의 고통 자체가 인내, 연단을 거쳐 소망과 기쁨으로 화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럴 때 고통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더 좋은 것이 있긴 있다. 그런데 그것은 이 세상에서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고 그 뒤 영광을 주신다는 차원의 이야기다. 내일 모레, 한 달 뒤, 다른 좋은 것을 '반드시' 주실 것이라는 확신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이 있는데 그 뜻대로 가면 덜 고통스럽고, 좀 벗어나면 좀더 고통스럽고, 많이 벗어나면 아주 고통스럽다는 생각에 매여 있다. 혹은 하나님의 뜻대로 그래도 근접해서 가지 않으면 '두드려 맞는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하나님의 뜻'의 노예가 된 것이다. 자신의 정과 욕에서 죽지 않으면 결코 이 노예 상태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바로 그 길이다.

(이런 하나님의 길이 있다 치자. 그리고 잘못 가서 두드려 맞았다 치자. 그건 감사할 일이다. 성경에도 자녀면 반드시 징계가 있다고 말씀하지 않는가. 결국, 두드려 맞는 고통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맞는 고통이 문제가 되기 않고, 잘못 선택해서 감당해야 할 고통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할 때 자유를 누리게 된다. 우리는 두려워 하는, 염려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았다!)

세상에 대해서 내가 죽었기에, 나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자다. 그래서 벌거벗은 내 몸뚱이조차 내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하기에, 내 몸에서부터 시작해서 내게 허락되는 모든 상황과 조건은 감사의 제목일 뿐이다. 물론, 나는 불평한다. 육신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긴 안목에서는 감사한다.

내게 '조건이 좋지 않은' 배우자가 허락되고, 신앙 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하는 직장이 허락될지라도(물론, 나는 최선을 다해 '나의 선택'을 할 것이다. 되도록 좋은 배우자, 직장을 고르려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물이다. 선택의 책임은 모두 내게 있다.) 나는 감사한다. 고통이 증대되었다면, 그것으로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잘 선택해서 고통이 줄어들었다면 그것도 감사하다. 어차피 나는 흙으로 돌아가게 운명지어져 있었다. 안개였다.

모든 것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간다. 모든 내 공로를 무로 돌리고 오직 하나님의 의만 붙든다. 죽은 자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하나님은 내 고통을 없애주는 진통제가 아니다. 아멘.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다 들어 주신다? NO!]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 빌 4:6-7 -

추신> 이 글도 무슨 고통 자체가 즐거움이고 선하다고 보는 관점이라고 해석하지 말길. 고통 자체는 악한 것이다. 하지만, 인내는 선한 것이다. '연단'이라 함음 불이 지나간 후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이 정금과 같은 것이라는 게 증명되려면 불같은 고통이 지나가게 되어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믿음이 살아남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진짜 믿음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세상살이는 큰 안목에서는 이러한 연단이다. 그렇다고 해서 고통이 크면 클수록 좋다는 이야기가 '절대' 아니다. 고통도 의가 되면 율법주의가 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우리는 세상의 고통의 근원을 직시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의 고통과 고난을 알게 되며, 우리 또한 세상과 다르기에 어떤 방식으로든 고통과 고난을 당하게 되어있다. 이전에는 고통이라 못 느끼던 것이 이제는 고통이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우리를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징계다. 따라서 우리는 고통과 고난이 올 때, 힘차게 나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