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30, 2003

김동호 목사님의 ≪깨끗한 부자≫를 읽고

오래된 글
허세/과격/미숙함 주의

일단, 이 책에서 하는 이야기 중 대부분은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 내용들이다. 그리고 누구나 공감하는 내용들이다. '공정하게 돈을 벌어야 한다', '돈은 복이 아니다', '돈은 악이 아니다' 등등. 구구절절이 맞는 말을 한다. 구구절절이 명언이다. 마치, 공자님 말씀을 읽는 기분이다. 그러나 '구구절절이 명언'을 새롭게 들리도록 이야기할 수 있는 글솜씨 자체는 저자의 몫이다. '구구절절이 명언'은 '명언'이기에, 그래서 모두가 동의하기에 증명의 부담을 피할 수 있다. 따라서, '구구절절이 명언들'로써 새롭게 들리도록 이야기하는 글은 대단히 설득력이 있고 강력하다. 자기만의 주장을 조금만 보태면 그 주장은 나머지의 강력한 논거들('구구절절이 명언들')과 글솜씨의 뒷받침을 받아 엄청난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다.

이런 책을 읽을 때는 일단, 내용에 몰입해서 읽고 난 뒤, 냉수를 한 그릇 마시고 정신을 가다듬어야 한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무엇이 저자 자신만의 목소리였는가를. 그리고 거기에 설득 당해 있는 내 자신이 어떻게 변해 있나를 체크해 봐야 한다. 그 책을 읽고 난 뒤 '새롭게' 확신하게 된 것은 무엇인가를 규명해야 한다.

이 책의 1부에서 강조하는 것은 '청지기 의식'이다. 즉, 우리가 돈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돈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는 은사요, 소명이다. 따라서, 돈은 복이 아니다. 복은 예수 믿으면 누구나 받지만, 은사는 누구나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돈은 악도 아니다. 정직하게 벌어 옳게 쓰면 돈도 선이 될 수 있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그렇다면 돈에 대해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나오겠다.

2부에서 바로 그 이야기를 한다. 일단, 저자는 에리히 프롬의 '소유'와 '존재' 개념을 원용하여 존재를 추구하는 사람이 되라는 '명언'을 하신다. 이 명언은 '부의 소유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지 말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따라서, 부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그 부의 소유 자체에 의미를 두지 말고 그 부를 획득하고 사용하는 과정에 의미를 두어야 한다. 깨끗하게 벌고 옳게 쓰면 된다. 많이 가져도 '존재형의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를 누리는 것에 대해 정직하게 벌고 정직하게 쓴다면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을 송구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런 맥락에서, 무조건적으로 가난을 미화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방식이 통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오히려 정직한 크리스천들이 세상의 부를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좋다.

3부는 각론이다. 그럼, 어떻게 돈을 벌고, 어떻게 돈을 쓴 것인가. '하늘에 쌓을 수 있는 돈'을 벌고, '하나님과 이웃의 몫'을 제대로 챙겨 주는 방식으로 돈을 써야 한다. 4부는 이 책의 대미다. '청부가 되라'. 구체적인 방법론과 더불어 '세상의 불공평함, 부함과 강함'의 당위성에 대한 변증이 포함되어 있다.

자, 그럼 냉수를 이제 한 잔 들이키자... 이제 삐딱하게 함 보자. 이 책에서 김동호 목사님만의 목소리는 무엇인가―우리는 이것을 집어내야 한다. 이 책의 묘미는 기존의 기복 신앙, 즉 '돈 많이 버는 게 하나님의 복이요 선'이라는 식의 신앙을 타파하면서도 '돈 많이 버는 것'을 구원해 내는 데 있다.

'기복 신앙'은 이미 정죄되었다. 웬만큼 '무식'하지 않으면 요즘에는 '물질=하나님의 복'이라는 원색적인 주장을 하지는 않는다. 저자는, 기존 기복 신앙을 다음과 같이 극복한다. 우선, 기복 신앙에서 부를 '복'이라고 한 것을 '은사'로 치환한다. 복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받는 것이기에 부를 복이라고 할 때, 모든 그리스도인이 부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부를 은사라고 할 때, 모든 그리스도인이 부자가 될 필요는 없어진다. 그리고 복이 선한 것이기에 기복 신앙에서 돈은 선했다. 부는 선이고 가난은 악이었다. 하지만, 저자는 돈을 가치 중립 지대에다 갖다 놓는다. 부와 가난 모두 선할 수도/선해질 수도, 악할 수도/악해질 수도 있다. 또, 기복 신앙에서 부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 그래서 내 것'이었다. 하지만, 저자는 부를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 그러나 하나님 것'으로 본다. 부자인 나는 '청지기'다.

이상과 같은 '청부론'이 가지는 함의는 무엇인가. 우선, '부자가 되는 것'은 '전필'이 아니라, '교양선택'이 되었다. '선택'은 누구의 선택인가. 저자는 부를 '은사', '하나님의 상급'으로 규정한다. 그렇다면 부자가 되는 것은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이다. 부자는 하나님이 선택하신다.

근데, 저자는 "하나님은 우리가 좋은 것을 먹고 마시고 입고 사는 것을 좋아하신다"(94쪽)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불의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다가 좋은 것을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고 입지 못하며 사는 것은 귀하게 보시지만" 일반적으로는 성도들이 좋은 것을 누리고 사는 것을 기뻐하신다. 따라서, "세상의 빈곤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자기 욕심을 따라 잘못 살아서 나타난 현상이다"(61쪽).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사람들은 누구나 궁극적으로 부유한 삶을 살 수 있다"(72쪽). 이 부는 "하나님이 은혜와 상급으로 주시는 부"다. 저자는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사는 것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고" 사는 삶이라고 정의한다(94쪽).

이상의 주장들을 우리는 다음과 같은 논증으로 재구성해 볼 수 있다. 가1: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부하게 살 수 있다. 가2: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도 부하게 살지 못하는 경우는 불의한 세상에서 핍박받는 경우뿐이다. 가: 핍박받는 경우를 제외하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부하게 산다. 나: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야 한다. =>결론: 핍박받는 경우를 제외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부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는 위의 논증에서 '가1'의 '부하게 살 수 있다'가 '가'에서 '부하게 산다'로 바뀐 것에 주목하게 된다. '가1'은 저자가 1부에서 설명한 '은사'의 개념이다. 하지만, '가'는 저자가 역시 1부에서 설명한 '복'의 개념이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복'은 예수 믿으면 모두 받는 것(저자는 '구원'을 그 예로 들고 있다, 22쪽)이지만 은사는 모두 받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가1-가'의 논증을 통해 '은사'를 '복'으로 은근슬쩍 바꾸고 있다. 즉, 1부에서 부를 '은사'라고 해놓고 이제 '복'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복 받은 자'이므로 (핍박받는 경우를 제외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부하게 살아야 한다!

이렇게 볼 때, '부자가 되는 것'은 다시 '전필'로 돌아온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는 모든 사람을 선택하신다! 이 '은사'는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받는 것이므로 사실은 '복'이다. 따라서, '청부론'은 '모든 그리스도인 부자는 깨끗해야 한다'를 넘어서, '그리스도인이라면 깨끗한 부자여야 한다'에까지 나아간다.


이상의 내용에서 저자가 처음에는 기복신앙을 거부했지만, 다시 기복신앙(비슷한 것)으로 돌아가 버린 것을 보게 된다. 1부에서 저자가 기복신앙을 거부하며 전개했던 논지의 신선함은 2부, 3부로 넘어가면서 퇴색되고, 오히려 기복신앙의 물결에 함몰되어버리는 저자를 목격하게 된다. 왜 이런 결과가 생겼을까. 필자는 저자가 "하나님은 우리가 좋은 것을 먹고 마시고 입고 사는 것을 좋아하신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 전제는 저자와 기복신앙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좋은 것을 먹고 마시고 입고 사는 것을 좋아하신다"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입장(개혁파)에서 볼 때, 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게 좀 복잡다단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직접 이루신다고 고백한다. 예를 들면, 예수님 믿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사람이 믿음을 창출해 내지 못한다. 분명, 사람이 믿기는 하지만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2:8). 우리는 성화 역시 성령의 사역으로 고백한다(이것은 믿음과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내가 노력해서 착하게 살지만(그리고 그래야 한다), 그 선행은 내 공로가 아니다. 성령님의 선물이다. 이 선행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을 보여주는 징표이고, 이것을 통해서 나는 나의 멋짐을 확인하는 게 아니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성화)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한다.

기실, 기복주의나 김동호 목사님은 방식에 있어서는 굉장히 개혁파적인 면이 있다. 어쨌든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즉, 기복신앙에서는 '성도들이 돈 많이 버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므로 성도 개인이 어떤 우여곡절을 겪어도 결국에는 돈을 많이 벌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물론, 기복신앙에도 다른 버전, 좀더 질 나쁜 버전이 있긴 하다. '많이 바치면 많이 주신다'는 버전이 바로 그것이다}. 마찬가지로, 저자도 "하나님은 우리가 좋은 것을 먹고 마시고 입고 사는 것을 좋아하시므로" 예외를 제외하고는 결국 성도는 잘 살게 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성도는 자신의 부요함을 통해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뜻("하나님은 우리가 좋은 것을 먹고 마시고 입고 사는 것을 좋아하신다")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은 우리가 좋은 것을 먹고 마시고 입고 사는 것을 좋아하신다"는 과연 '하나님의 뜻'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우리는 왜 이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부르는가? 이러한 결론은 다음과 같은 일련의 과정을 따른다. "나를 비롯한 사람들은 가난한 것보다 부한 것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가난보다는 부요한 것이 확실히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나하고 '비슷하게' 판단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우리가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더 좋아하실 게 확실하다." 아닌가? 실상,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계시인 성경을 읽어보지 않고 얼마든지 이런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성경 읽을 필요가 굳이 없다. 나의 모습을 기준으로 하여 하나님의 모습을 짐작해 내는 것이다. [이것은 가난하게 사는 것이 부하게 사는 것보다 더 하나님의 뜻에 가깝다는 판단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다. 그대의 도덕적 지향인가, 아니면 성경이 말하는 바인가. 이 둘을 구분할 필요가 있냐고? 난 있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다음에 글 쓸 기회가 있음 써보겠다.]

그럼, 성경에서도 이런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는가? 필자가 보기에는 부정적이다. 단적인 예로 예수님을 보라. 예수님은 예외라고? 그럼, 바울을 보라. 바울도 예외라고? 그럼, 늘 본받고 싶어하는 소위 '비전의 사람' 요셉을 보라. 그대는 왜 요셉이 국무총리된 것만 강조하는가? 국무총리되고 싶은 그대여, 그대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기에 요셉이 감당해야 했던 그 고난과 가난함을 감당할 믿음이 있는가? 다윗을 보라. 왜 그대는 다윗이 잘 나갈 때만 보려고 하는가. 그대는 다윗이 통과해야 했던 눈물과 고난의 세월을 통과할 만한 자신이 있는가? 실상, 마음을 비우고 성경이 이야기하는 바를 정직하게 대면한다면 그대는 알게 될 것이다. 예수 믿으면 얻을 것보다 잃을 게 더 많게 된다는 사실을... 그리고 포기해야 하고 죽어야 할 때가 움켜쥐고 활력 있을 때보다 더 많게 되리라는 판단에 눈앞이 아득해짐을 느낄 것이다. 내 능력을 발휘할 때보다 조용히 넘어가야 할 때가 더 많을 것이라는 사실에 의욕이 팍 꺾이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아브라함, 요셉, 다윗... 이 모든 믿음의 선진들을 잘 살펴 보라. 그리고 그대가 본받고자 하는 본질이 무엇인가를 직시하라. 그들의 믿음인가, 그들이 잘 나갈 때의 모습인가. 그들이 믿은 하나님은 자신을 부자로 만드시는 하나님이신가. 어떤 사람은 필자처럼 성경을 대면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새디스트로 만든다'라고 욕한다. 그래,,, 그대가 보기엔 새디스트일 수도 있겠다. 자기 아들을 죽음에 넘겨주고 외면한 아버지이니... 그것도 영원 전부터 예정했단다. 이보다 더 나쁜 아버지, 새디스트 아버지가 어디 있는가...? 하지만, 성경은 항상 이야기한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히 5:8)" 이 모든 예들을 단지 '예외'로만 치부하기에는 성경 전체에 걸쳐 '고난을 통한 순종', '가난해짐을 통한 부요해짐', '섬김을 통한 으뜸됨' 등의 원리가 나타나 있다.

성경의 많은 반증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가장한 우리의 뜻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잘 먹고 잘 살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은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라는 말은 우리가 얼마든지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깨끗하게 살도록 하나님께 명령받고 있다. 하지만,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깨끗하게만 살면 부요한 삶이 보장되어 있다', 나아가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깨끗한 부자가 되어야 한다'라는 주장을 우리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예외'가 아닌 평범한 경우라도 부하게도 매우 가난하게도 살 수 있는 것이다.

청부론은 재물에 대한 도덕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냥 그만큼만 참조하면 된다. 그러나 청부론이 전제하고 있는 위와 같은 하나님의 모습은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우리는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좋아하신다"라는 생각을 놓아버려야 한다. 이것을 놓을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진선미를 뒤집어 놓는다. 부가 아니라 가난이요, 지혜가 아니라 어리석음이요, 참말이 아니라 거짓말이요, 아름다움이 아니라 추함이요, 선함이 아니라 악함이다. 그러나 가장 부하고 가장 지혜롭고 가장 참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선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요, 선이요, 아름다움이다. 우리가 이 형용모순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때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을 보여주시고 나타내시는 성령님, 이 삼위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그 은혜를 묵상하고 그 형상의 아름다움을 관조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