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글
허세/과격/미숙함 주의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이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 벧후 1:3-4 -
요즘 블라디미르 로스키라는, 정교회 신학자의 책을 읽고 있다. 제목은 '동방교회의 신비신학'. 상당히 재미있게 읽고 있다. 서방 교회, 그것도 종교 개혁의 입장에 서있는 우리로서는 약간 낯선 접근이지만, 동방교회는 구원을 '신화(神化)[deification/θεωσιs]'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신대원 오기 전부터 '각 개인의 구원'의 차원에서 성경을 보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내게 해답을 준 말씀이 바로 위에서 인용한 베드로 사도의 말씀이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은 '하나님의 영광'을 강조하는 개혁신앙과도 연결이 되는 것이다.
만약,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구원하시는 것이 예수님 고난과 죽으심의 궁극적 목적이었다고 한다면 성경만큼 싱거운 이야기는 없다. 그리고 성경은 겨우 이 이야기하기 위해서 창조부터 시작하는, 구라로 똘똘 뭉쳐 있는 책이 된다. 실상, 우리는 '개인 구원'에 집중을 하다 보니, 창조, 섭리, 하나님의 하나님되심 등은 따로 따로 생각한다. 창조주 하나님, 구속주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이 모든 것은 다 다른 맥락에서 다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뉘시는 분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다 보니, 여호와 하나님은 '유혹자 하나님'이 된다. '제발 믿어라, 안 그러면 지옥 간다... 그러니 믿어라, 응??' 하나님은 '구원'이라는 지고 가치에 봉사하는 신이 되어 버린다. 그래, 생명은 소중한 것이여... 생명을 건지기 위해서 하나님은 무슨 짓이라도 다하는, 무슨 방법이라도 다 쓰는 그런 유혹자가 되어 버린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성경은 개인 구원을 말하지 않는다. '어느 한 자리'를 이야기한다. 구원은 그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 자리는 바로 '하나님이 약속한 자리'이다(4절).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내어 그 약속을 증거하는 자들, 그들에게만 허락된 자리이다. 구원은 '죽어서 천국가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건짐 받는 것', '-로부터의 구원'이다. 우선, 하나님의 진노로부터의 구원이다. 사망으로부터의 구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약속한 자리' 외의 다른 자리는 '멸망', '사망', '진노 아래 처해 있음'이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는 말이다.
이렇게 볼 때, 그 자리가 바로 '생명'이다. 생명은 그 자리에 있고 없고로 결판이 난다. 그 자리에 지금 있는가? 그러면 그대는 살아있는 것이다. 죽어도 살아 있다-이것을 확증하는 것이 죽은 몸의 부활이다. 그러므로 '죽어서 천국 간다'라는 말은 생명과 사망의 경계를 제대로 잡아내지 못하는 말이다. 생명에 대한 생물학적/의학적 정의는 성경의 생명-사망과 관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우리에게 지시하고 있는 한 땅('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 벧전1:4)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구원이요, 생명이요, 의로움이요... 라고 이해해야 한다. 그 땅에는 하나님이 계신다. 이것이 바로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그리스도 안'이라고 표현한다(창세기1장은 '하나님의 형상 안'이라고 표현한다. 개역 성경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라고 번역한 말은 원문에서는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이다. 창조는 하나님의 형상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그러므로 새 창조 안에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그 지체가 됨'을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그 자리가 바로 임마누엘의 자리요, 그리스도 안이요, 그리스도와 한 몸되는, 즉 그리스도의 신부되는 자리다. 그리스도와 한 몸됨-이것이 바로 '신화', 즉 '신의 성품에 참예함'이다. 그 자리에는 어떻게 들어가는가. 하나님을 관상하는가? 신비적인 결합이 필요한가? 아니다. 오직 믿음으로 들어간다. 믿음으로라야 하나님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을 제대로 본 자, 오직 그 만이 그 자리가 어디에 있는지 안다.
그렇다면, 여기, 베드로 사도가 이야기하는 '신의 성품'은 무엇인가. 전후 문맥을 고려해 보면, 신의 성품은 바로 '썩지 않음', 즉 '생명'이다. 천상천하에 썩지 않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피조물은 썩는다(썩는 것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썩지 않음에 동참하는 것, 이게 바로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이다. 반드시 썩게 되어 있는 피조물이 썩지 않음에 동참함으로 말미암아 썩음을 이기는, 즉 '사망을 이기는' 하나님의 생명을 증거하는 것이다(그러므로 부활은 반드시 '죽을 몸'이 살아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원래부터 영생불사의 몸이 아니라, 죽을 몸이 썩음을 이기고 살아남으로 썩음을 이기게 하신 분과 그 분의 생명을 증거하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자리는 바로 이것을 위해 마련된 자리이다.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계시하기 위한 자리가 바로 이 자리다. 이 자리는 그러므로 자기의 '생명 없음'이 증거되는 자리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붙드시지 않으면 순식간에 흙먼지(나는 본래 흙이다)로 사라질 존재라는 것을 증거하는 자리이다. 내게서 나온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 나를 살아있게 한다는 것을 증거하는 자리이다. 이 증거됨이 바로 '영광'이다('영광'은 하나님 아닌 것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소위 '하나님께 영광돌린다'는 표현은 성경의 진의를 벗어나 매우 종교적인 용어로 타락해 버렸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몸소 결정하시고 나타내시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사망됨과 흙됨(이것이 죄인됨, 즉 '원죄'의 요체다. 원죄는 일차적으로 '존재'의 차원이다. 인간의 실존이 사망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사망됨을 인정하지 않고 생명으로 여기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되심을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 나아가서는 자신이 생명이라고 여기는 것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한다)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생명되심(즉 죽음을 이기는 생명-부활 생명)과, 그 생명이 그 아들 안에서 충만히 나타났으며 그 아들 안에 있다는 것을 믿을 때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된다. 죽으면 산다. 죽으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다, 그리스도가 된다, 하나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