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글
허세/과격/미숙함 주의
이런 이야기를 하면 지금의 한국 교회 분위기에서는 욕 먹을지 모르나... 나는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의 선/악, 의/불의, 미/추... 등이 사람의 것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 그리고 그 사이에는 '필연적' 교집합은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우연한' 교집합은 있다). 그러하기에 복음은 문화와 시대를 초월한다. 복음은 모든 민족과 나라에 전파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이웃을 사랑한다면 '이웃 사랑'이라는 덕목이 '원래' 선하기 때문인가. 불신자보다 '더' 선해야 하기 때문인가. 성경을 읽어보면 '원래' 선한 것은 하나도 없다. 원래 선한 분만 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더 잘함'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방인보다 더 잘해야 함을 말하지 않는다(이방인보다 더 착하거나 더 탁월해야 한다는 것은 따라서 성경의 메시지가 아니다). 단지, 이방인과 달라야 함, 즉 '거룩'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거룩'은 고립적 다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 뭐 이런 류의 다름이 아니다. '관계적 다름'이다. 즉, 우리 아버지가 다른 숱한 아저씨들과 다를 때의 그 다름, 내 애인이 다른 숱한 여성들과 다를 때의 그 다름, 내 가방이 다른 숱한 가방들과 다를 때의 그 다름,,, 뭐 이런 종류의 다름이다. 그러므로 '질적' 다름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외모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관계의 선상에서 정의되는 다름일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는다).
성경은 거룩을 이야기하고 있기에 모든 질적 다름은 무시된다. 동시에, 성경은 거룩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속됨'과 거룩과의 단절은 영원하며 메꿀 수 없다. 빛과 어둠은 섞일 수 없으며, 하나님과 벨리알은 함께 할 수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스럽지 않은 것/곳에는 함께 하시지 않으신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스러움을 확증하는 것이다. 누구나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지만, 누구나 하나님의 백성인 것은 아니다.
거룩은 다름이기에 알려진다, 인식된다. 그러므로 거룩이 곧 하나님의 자기계시다. 하나님은 같은 것들 중 다름을 보이심으로 세상에 당신을 알리신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고는 만유는 똑같아야 한다. 오직 하나님은 다른 분이어야 한다. 이게 바로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라는 말의 의미다. 그리고 하나님스러운 것, 즉 하나님을 알려주는 매체가 되는 것을 하나님은 '진/선/미'로 규정하신다. 하나님을 알려주는 것만이 선하고 의롭고 아름답고 진리다. 여기까지 와서야 비로소 선/악의 문제인 윤리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을 이해할 때, 우리는 왜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완성, 즉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 예수인가를 이해하게 된다. 앞에서의 논리를 이해한다면 하나님의 의로움, 하나님의 선함, 하나님의 진리가 무엇인가, 나아가서는 '누구인가'를 우리는 물을 수 있고 답을 들을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 즉 생명을 내신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맨 처음에 생명 없음 가운데 홀로 살아계심을 보여 주심으로써 자신의 거룩을 드러내셨다. 모든 것은 죽어있다. 단지 하나님 홀로 살아계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생명없는 만물에게 생명을 주심으로 만물을 거룩하게 하셨다. 이 일련의 행위가 바로 창조다. 이렇게 하나님의 거룩함을 보여주는 상황이 바로 '그 이름의 충만'이다. 시편 8편은 바로 이 상태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죄는 바로 하나님의 거룩을 거부하는 것이다. 하나님만 홀로 살아계신 분이시며 우리는 '그의 안에서'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것을 떠나 그의 밖에서 살아있고자 하는 것, 이게 바로 죄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고 우상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없이 살아있는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면 죽는다. '두 생명'이 조우하는 곳에는 반드시 한 생명이 살해된다. 천상천하 생명은 둘일 수 없다. 하나님은 자기의 생명만이 생명임을 확증하시기 위해 다른 생명은 심판하신다(종말의 심판은 바로 온 세상의 생명없음을 확증하는 행위다. 세상은 죽고 부활해야만 다시 완전한 하나님의 계시체가 될 수 있다). 선지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한 것은 이 선상에서 이해를 해야 한다. 그냥 '하나님은 너무 초월적이고 거룩해서'라는 식의 종교적 감성을 가지고 접근해서는 성경의 논리를 따라가지 못한다.]
이렇게 보면 지금 온 세상은 죄 아래 있다. 만물은 '자명하게' 여호와 하나님을 드러내지 않는다. 세상이 하나님의 이름 밖에 있다는 것을 확증하는 현상이 바로 만물의 죽음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죽는다. 죽은, 죽는 모든 것은 선하지 못하며 의롭지 못하며 거짓된 것이다. 따라서, 심판의 대상이다.
반복하는 이야기지만, 창조는 그냥 이루어진 게 아니다. 무엇을 보여 주기 위해서 창조가 이루어졌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다. '형상'은 사물이 아니다. 형상은 바로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다(골 1:15). 아들은 아버지를 나타낸다(요 1:18). 만물은 아들 안에서 창조되었고 아들로 말미암고 아들을 위하여 창조되었으며, 아들은 만물보다 먼저 계시기에 창조된 분이 아니시며 만물은 아들 안에 함께 서있다(골 1:16-17). 창조 기사는 세상의 기원을 알려주기 위해 기록된 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인 아들, 그 아들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리고 그 아들이 나타내는 아버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기록되었다(성경은 처음부터 아들을 중심으로 풀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바로 아들이다. 아들이 하나님이 보여주고자 하는 모든 것이며, 아들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며 의며 선이며 아름다움이며 선물이다.
그러므로 죄는 아들 밖, 형상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매개체가 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새로운 피조물, 혹은 새 창조('제대로 된' 창조) 안에 있는 것이다. [바울이 사용하는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해야, 그리고 그 형상은 '머리됨'으로 묶여진다는 것을 이해해야 제대로 받을 수 있는 말이다. 그리스도 안이 만유다. 즉, 만유는 형상 안으로, 형상 아래에 종이 되어 형상에 참예한다(인간도 예외가 아니다)--이것이 '머리됨으로 묶인다'라는 말의 의미다. 머리는 그리스도다. '머리-종'을 규정짓는 게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아들 말고 만유는 그 자체에 생명이 있는 게 아니라 말씀에 의해 생명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종-불순종이 관건이며 지식이 관건이다. 따라서 형상의 내용은 말씀에 의해 지탱되는 생명, 즉 말씀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중간에 다른 이야기들을 생략하고, 그리스도의 오심은 '형상의 임함',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보여주는, 즉 말씀 자체인 형상의 임함이다.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는 단 한 군데, 한 점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다. 온 세상은 죄 아래 있고 단 한 군데만 의로운 자리다. 단 한 점만 선하다. 이 곳, 바로 이 곳, 오직 그리스도의 몸! 바로 교회다. 이 곳만 임마누엘이 실현되는 자리요,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비전[vision]을 이해하게 된다--만유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는 것, 즉 만유가 그리스도가 되며 만유가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 그래서 성전이 필요없는 것, 천상천하 어디에도 비형상(非形象)이 존재하지 않는 것, 바로 이거다.]
이제서야(진짜로^^ 쩝, 너무 돌아 온 느낌...) 윤리를 이야기할 수 있다...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眞 善 美 義...'라면, 그리스도 안에서 가치와 존재가 합일된다. 윤리가 주로 가치의 문제, 의지의 문제에 연관되어 있는 것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좋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하고[seek]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 (굳이 이름붙인다면) '기독교 윤리'의 요체라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보면, '경건' 그 자체가 윤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윤리'이긴 한대 '윤리적'이지는 않다.
작금의 다원주의적 현실에서, 다원주의적 관점으로 보면, 분명 복음이 제공하는 이런 독특한 시각은 '하나의' 윤리로 볼 수도 있다. 많은 '윤리들' 중 하나의 윤리다. 하지만, 복음은 이런 분류를 거부한다. 다른 선, 다른 의, 다른 윤리를 '악하다'라고 심판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기독교 윤리'는 윤리가 아니다. 굳이 기독교 윤리를 윤리로 보고자 한다면 다른 윤리들이 윤리가 아니게 된다(물론, 주로 내용적인 측면에서의 논의다). 여기에 우리의 긴장과 고민이 있다. [여기서 복음이 '악하다'고 심판하는 것은 개별 덕목들이 아니다. 완결된 체계로서의 윤리다. 기독교 윤리도 사랑을 이야기하고 대다수의 윤리들도 사랑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기독교 윤리가 사랑 등의 덕목을 긍정하는 것은 사랑이 '원래 선하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렇다. 기독교 윤리나 세상 윤리가 다같이 사랑을 긍정하는 것은, 사랑은 선하기 때문에 긍정해야 한다는 필연성에 근거하는 게 아니다. 나아가서, 복음 안에서 사랑, 의, 선... 이 모든 것은 재정의된다, 그리스도를 내용으로 해서.]
이러한 복음의 윤리적 현실을 바울은 한 마디로 요약한다. '그리스도를 본받음'.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행동을 따라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와 공유하는 예수님의 인성을 바탕으로 하여 행해지는 '예수 따라하기'가 아니다, '예수처럼 생각하기'도 아니다. 해방둥이 예수, 부자 예수, 가난뱅이 예수, 히피 예수,,, 이 모든 것은 예수 우상일 뿐이다. 저도 사람, 나도 사람, 열심히 노력해서 예수 본받아 보세, 그러세!!! 뭐 이런 게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을 수 없다.
바울이 이야기하는 그리스도를 본받음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을 본받음을 의미한다. 이 부활 생명은 (밖으로) 나타난다. 그 나타남이 바로 전도다(지금의 '전도'로 오해하지 말길). 그리고 이 전도에 수반되는 것이 핍박과 고난이다. '예수님처럼' 고난을 받아야 생명에 이를 수 있다. 그런데 부활 생명은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듣고 믿음으로 이를 수 있는 경지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열리는 세계다. 그러므로 달음질하는 자로 말미암지 않는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본받음은 '참 생명'의 차원에서 이야기되는 것이지, 제 눈에 보기에 좋은 대로 골라잡아 본받는 게 아니다. 우리가 참 생명인 부활 생명을 얻게 되었다면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을 나타내는 것, 시현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생명을 계시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본받음'은 우선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 (낳았기 때문에) '닮음'의 문제다.
이상에서의 논의를 몇 줄로 요약하여 이야기해 보자. 일단, 하나님만 선하다. 이 말은 '하나님 빼고 다 악하다'와 바꿔 쓸 수 있으며, 하나님의 선함에 참예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 가능하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본받음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제일 처음(태초)부터 '살아계시는 하나님'으로 자신을 계시하시기에 형상의 요체는 '생명'이라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누리는 생명만이 '참' 생명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생명 대신 '있음(존재)'의 근원으로 하나님을 파악하려는 전통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존재는 생명 창조에 따라나오는, 붙어나오는, 묻어나오는 것일 뿐이다. '하나님도 있고 나도 있다' 여기서, '그러니까 있는 것들(혹은 있음)에서 시작해서 하나님을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라는 입장으로 흐르면 자연 신학이 되고, '그러니까 나도 하나님이다'로 흐르면 무신론이 된다. 그러나 성경의 입장에서는 (참) 생명이 없는 것, 죽은(는) 것은 '없는' 것이다. 생명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 즉 형상 안에 거하는 것,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이렇게 봐야 그리스도를 생명과 사망의 경계로 보는 신약의 사고가 이해된다). 꽃은 시들고 풀은 마르나 여호와의 말씀은 영영히 선다. 하나님 말고 살아있음을 주장하는 모든 것을 불로 소멸하여 그것이 사망이었음을 확인하는 것(불못)이 바로 종말의 대심판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받아들인 뒤 관건은 '계시 매개체'가 되는 것이다. 실상, 계시 매개체는 한 몸, 한 분뿐이다--예수님. 우리는 그의 안에 참예함으로 빛을 나누어 가진다. 그의 지체가 됨으로 그의 몸에 동참한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는 예수님의 선언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착한 행실'은 세상의 선악을 따르는 행위, 자기를 그려내는 행위가 아니라(이 행위가 바울 사도가 정죄하는 행위다), '형상을 그려내는 행위'로서(이 행위가 야고보 사도가 옹호하는 행위다), 자기 죽음과 자기 부인(자기 정죄)이 전제되어 있다('선한 양심'은 바로 하나님이 선하다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양심을 일컫는 말이다). 이렇게 볼 때, 생명을 표현해 내는 것, 형상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행위에 관건이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까지 오면 드디어 윤리의 차원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윤리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현실을 '표현해 내는 것'이기에 기술적(記述的)이라고 할 수 있다. 윤리 이전에 존재가 오며, 존재를 명확히 관(觀)하지 못하는 한, 결코 살아낼 수 없는 윤리 현실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자체로 '표적[σημειον]'이며, 다분히 기호론적[semiological: 앞의 '표적'이라는 말에서 나왔음]이다. 그러나 물론, 기의가 기표보다 중요하다. 유대인은 기표를 중시한다. '비까번쩍함', 즉 하나님됨을 위대함과 찬란함으로 나타내기를 요구한다. 이러한 유대인, 그리고 인간 본연의 원죄적 요구에 하나님은 미련하고 찌끼 같은 기표로 응답하신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가난, 머리둘 곳 없음, 고난, 죽음--즉 십자가가 해명된다. 비까번쩍함을 찾는 자들은 성경의 기의,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내용을 읽지 못하고 지나가게 된다. 야곱,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인간과 싸움해서 지는 하나님, 긍휼과 은혜의 하나님으로 등장한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인의 윤리에서 핵심은 '거룩함'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근거로 '다르게 살아야 함(계시 매개체로서의 삶)'이 바로 거룩함이다. 이 거룩함은 전투적이다. 거룩하지 않은 모든 것, 하나님의 거룩함 말고 다른 거룩함들을 '죄'라고 선언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모든 것이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할 때는 상당히 도발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모두가 도덕적으로 불완전하다는, 동서고금 누구나 다 해왔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죄 역시 우선 존재론적이다.
이것은 역으로, 그리스도인에게 (세상적 의미에서) '윤리적 삶'을 요구한다. 절대적으로 정형화된 '기독교 윤리'는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속한 시대, 장소에서 그곳의 윤리 및 질서를 따르며 살아야 한다. 왜? 비윤리, 혹은 탈법이 복음과 동일시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그리스도인은 똑같이 살지만, 완전히 별개의 한 현실을 표현해 내면서 살아야 한다. 이 내용이 더 진해지기 위해, 그리고 혼잡되지 않게 하기 위해, 독해를 확실히 시키기 위해. 그러므로 육체를 괴롭게 하는 것이나 육체를 확장하는 것(치부)에 복음의 요체를 싣는 것은 반복음적이다.
여기서, 논의를 좀더 구체적인 방향으로 돌려볼 필요가 있는 듯하다. 세상 윤리가 좋아하는 것들 중 '우연히도' 복음적 삶과 일치되는 덕목들이 꽤 있다. 대표적인 것이 '사랑'과 '정직' 등이다. 이것들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