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1, 2003

그리스도는 해체하신다

오래된 글
허세/과격/미숙함 주의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 5:39-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요 5:46-

예수님은 구약에서 자기가 발견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을 주장하신다. 당시 지배적인 구약 독법은 구약을 "구원 시스템"으로 읽어내는 독법이었다. 이 독법은 철저하게 "성경 중심", "하나님 중심"이다. 그러나 그 위에 인간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베풀어 놓으신 구원 시스템을 잘 알고 순종하면 구원이 확보된다는 것이다. 구약 성경은 그러므로 일종의 매뉴얼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독법을 부정하신다. 참람하게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자기에 대해> 증거하는 것이라고 또록또록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감히 일개 청년이 수천년의 성경 독법 전통을 반박하다니.

이런 예수님의 독법을 따르면, 그들이 수천년 간 섬겨온 하나님은 "마귀"가 된다. 그들의 하나님 형상과 예수님이 자기 아버지라 부르는 그 하나님은 모양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아버지 하나님을 "아비 마귀"라고 매도해 버리신다.

흔히들, 바리새인이 매우 부도덕하고 아주 질나쁜 사람이라 상상하기 쉽지만,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고 유대역사를 함 공부해보라. 그 사람들은 아주 도덕적이다 못해 순결에 대한 강박관념마저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삶은 아주 철저했다. "자민족 중심주의"라고 매도해 버리기에는 이들의 삶은 고결했다. 그리고 그 자민족 중심주의도 사실, <열려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바다와 육지를 다니며 교인들을 모으는 자였다. 어떤 이방인도 유대인이 될 길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비방한 것은 <더러운 삶>이지, <이방인됨>이 아니었다. 아무리 이방인이라도 하나님이 정하신 <깨끗함>의 영역에 들어오면 깨끗해진다. 실제로 이런 이들의 삶은 아주 매력이 있고 고매해서 많은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했다. 이른바, <삶으로서> 전도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이 섬긴 하나님은 말 안해도 뻔하다. 아주 순결하고 거룩하고 모든 선한 것들을 다 모아놓은 그런 신이었을 것이다―그런데 이 하나님을 예수님은 "마귀"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들을 "외식하는 자"로 비방하신 것은 단지, <겉과 속이 다른 것>을 비방하신 것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겉과 속이 다르다. 오히려 이들은 겉과 속을 최대한 같게 만들려고 열심히 수련한 자들이다. 겉과 속이 원래 다를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에게 겉과 속이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진리를 설파하는 데 따르는 권력을 행사할 수는 있지만 지나가고 나면 큰 의미를 지니지는 못한다. 예수님은 <지당한>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보기 싫어하는 한 현실, 그들이 인정할 수 없는 한 사실을 적시하고 계시는 것이다―자기들이 그토록 숭배하며 경애하는 그 하나님을 각을 뜨고(해체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명확하다. 구약 성경은 자신에 대한 증거, 이야기로 읽어야 구약 성경의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 외의 독법은 모두 구약의 하나님을 제단하고 해체하는 독법일 뿐이라는 것이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위하는> 삶이라고 하지만, 결국 말씀은 자신을 치장(외식)하고 정당화(의롭다 함)하는 데 쓰이는 도구로 화한다는 것이다.

구원 시스템으로 읽어내는 구약의 결국은 독자의 의롭다함이다. "어떻게 의롭다함을 받을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다. 하나님은 "Deus ex machina"로 전락하고 시스템의 일부로 기능한다. 이 의롭다함은 궁극적으로 풍요와 다산, 즉 땅에서의 생명을 확장하는 것으로 향한다. 바리새인들의 하나님은 성전에 살면서 던져주는 먹이를 넙죽넙죽 받아먹는 삽살개로 전락한 하나님이다. 세계 위에 뛰어난 이스라엘을 보장해주는 신, 램프의 지니같은 하나님으로 자리매김되는 하나님이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과 거짓 하나님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구약을 자기에게 대한 증거와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이 참 하나님을 알게되는 길이라는, <독선적이고도 교만한> 선언을 하신다. 이 선포 앞에서 여지껏 하나님 앞에서 고결한 삶을 살았던 바리새인들의 그 삶은 무너진다. 애국 충정으로 무장 투쟁을 하던 열심당의 그 열심은 된서리를 맞는다. 사두개파의 그 구약적 기득권은 허물어진다. 그리고 그들이 서있는 자리는 일순간에 <어둠과 사망의 그늘>, 즉 <지옥>으로 규정된다. 구원을 향한 모든 몸짓과 순결을 위해 흘린 모든 눈물과 땀은 한순간에 헛수고로 돌아가 버린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시험>했다. "시험"은 우리말로 "집적대다"라는 말이 가장 본의를 충실히 살려내는 말이다. 집적대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1. 유혹하는 것, 2. 두드려 패는 것. 이렇게 대담한 주장을 하는 걸 보면 이놈은 보통 놈이 아닐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우리가 기다려온 메시아왕일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예수님, 당신이 메시야라는 것을 증명한 해보이면 우리는 낮은 포복으로 "유격유격" 외치며 당신을 따르겠나이다! 그래서 그들은 <표적>을 구했다. 로마를 뒤집어 엎을 수 있는 표적을 우리에게 보여주시옵소서! 그들은 그런 가능성을 오병이어의 기적, 병고치는 은사 등에서 보려고 했다.

예수님은 당연 이들의 기대와 완전히 어긋나는 곳에 항상 서계셨다. 자신이 보여주는 표적은 요나의 표적, 즉 십자가뿐이라고 하시면서. 그러니까, 병고치는 거나 오병이어나 모두 <십자가 표적>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 된다. 십자가는 모든 표적들의 결론이다.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것과 완전히 어긋나는 메시아. 풍요 다산을 보장하는 전투적 정복자가 아니라 무력하게 죽는 메시아,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 그럼으로써 그들의 서있는 곳을 드러내어 버리시는 하나님―이것이 십자가다(십자가를 무슨 "겸손", "박애"의 화신으로 자꾸 보려고 하는 것도 예수님을 해체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싸우시고 폐하시고 무너뜨리신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다시 집적댔다. 이번에는 두드려 패려고, 아니 죽이려고 집적댔다. 예수님에게서 자신들의 서있는 곳을 사망으로 돌리는 십자가 형상을 서서히 보게 된 것이다. 이 심판의 형상을 그들은 덮어버려야 했다. 은폐해야 했다. 없애야 했다. 그래야 자기들이 "삶"이라고 생각하는 이 현실을 보장받을 수 있기에. 그래서 예수님을 집적대다 결국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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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읽기는 결국 십자가를 만나는 것이다. 십자가를 도려내고 읽어내는 성경읽기는 필연적으로 "외식"으로 화할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신칭의"도 외식으로 화할 수 있다. 작금의 복음주의에서 이런 위험을 본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책이 아니다. 우리의 구원은 <딸려>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우리 구원에 관심있는 분이 아니라 자기 아들에 관심있는 분이다. 만유 가운데 오직 아들만 선택하신다. 그러므로 구원은 아들을 알고 아들과 한 몸이 되는 것이다. 아들이 되어 선택을 받는 것이 구원이다.

만약 십자가 사건이 <내 죄를 다 용서받기 위한> 시스템의 한 부분으로 기능하고 있다면, 그대여, 그대는 바리새인이다. 그대가 오직 십자가 상에서 내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 모습밖에 모른다면, 내 구원을 보장받은 그 다음부터는 성경을 그대와 그대의 현실을 위해 읽어내기 시작한다면, 그대여, 그대는 바리새인이다.

그대가 서있는 자리를 죄와 사망의 자리로 말씀으로 온전히 규정해내고 오직 생명은 예수 안에만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붙들고 가는 자만이 예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자다.

십자가를 만나서 죽을(해체될) 것인가, 십자가를 해체할 것인가. 해체되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할 것이다, 새 생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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