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7, 2003

교회로서 성경읽기

오래된 글
허세/과격/미숙함 주의

조금만 열심이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열심히, 매일 성경을 본다. 우리는 이걸 일러 "QT"라 한다. 요즘에는 이걸 하는 세련된 <방법론>도 많이 나와있다. 그리고 이른바, "영성[spirituality]"이라는 흐름도 소개가 되어, 우리의 큐티를 더욱 풍성히(?) 해주고 있다.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종합할 수 있다―"자기로의 여행."

우리로 말씀을 읽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무엇이 우리를 끊임없이 말씀을 읽게 하는가. 우리는 "일용할 양식"에서 "일용할"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흔히, 말씀 보기를 일러 "영의 양식"이라고 한다. 이 말을 할 때, 우리에게 "영"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육신"의 양식을 안 먹으면 굶어죽듯, "영"의 양식도 먹어야 한다, 이 논리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영"을 그저 우리 팔다리나 똥배처럼 우리에게 붙어있는 신체기관, 즉 우리 몸의 일부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 말씀을 매일 먹어치운다.

우리가 매일 받아먹는 말씀이 주는 <배부름>의 정체는 무엇인가. 일러 "은혜"라 한다. 조금 더 들어가보자. 일러 "위로"라 한다. 조금 더 들어가보자―어떤 위로인가? 나의 존재를 긍정하고 나의 나됨을 세워주는 것, 우리는 이것을 일러 "위로"라 한다. 내가 힘들 때, 내 엉덩이를 툭툭 두드려주는 하나님, 내가 어려울 때 따뜻한 손을 내밀며 나를 일으키시는 하나님, 내가 현실에 매몰되어 영적 현실을 누리지 못할 때 나의 영성을 업그레이드시켜주는 하나님. 이 하나님들이 우리에게 위로를 주신다. 이 하나님들을 통해서 나는 내 안으로 들어가 <나를 여행한다>. 우리는 매일 이 위로를 먹으려고, 끊임없이 나를 세워주고 내 현실을 인정받으려고 말씀을 본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찬양이다.

우리는 이미 이 위로를 거절하면 <금단 현상>을 느끼는 정도까지 와있다. 말씀을 매일 안 읽으면 찌뿌등하다. 말씀에서 오는 <위로>를 받지 않고 하루를 시작하면 몸이 말을 듣지 않고 마음이 편칠 않다. 이런 금단 현상을 느끼며 '아, 내 신앙은 죽지 않았어!' 자위한다. 그러나 그대여, 그건 그대의 신앙이 아니라 말씀을 소비하지 못해서 오는 굶주림, 말씀을 <맞지> 못해서 오는 금단 현상일 뿐이다.

더 많은 자극을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유행을 창출해낸다. XX성경, AA해설성경, CC한영해설성경... 말씀은 끊임없이 가공된다. 말씀의 각을 떠 <먹음직한> 모양으로 생산해낸다. 하지만, 그렇게 가공된 말씀은 이미 <죽은> 말씀이다.

아, 물론 <고등 소비자>들은 좀더 고급 상품을 원한다. 말씀을 다같이 소비하지만, 고등 소비자들은 <불량식품>을 먹고 있다거나 <뽕>을 맞고 있다는 비난을 듣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보다는 남, 소아(小我)보다는 대아(大我)를 위해 말씀을 소비한다. 그래서 이른바, "진보"나 "청빈" 등의 흐름을 탄다.

그러나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똑같다―"자기로의 여행", 이거다. 숱하게 자기를 부인하고 숱하게 눈물흘리는 밤이 있고 숱하게 결단하는 아침이 있어도 결국 자기를 세우는 것으로 귀결된다. 자기 부인은 <알리바이>일 뿐이다―내가 <거기> 없음을 보임으로 <여기> 있다는 것은 더 부각된다(이 방법을 배우려면 불교를 보라. 기똥차다. 그래서 요즘은 "선 수행"과 "기독교 신비주의"의 접촉점을 찾으려는 시도가 왕성한 모양이다).

말씀은 그대와 그대가 긍정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그 현실을 긍정하지 않는다. 말씀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을 긍정할 뿐이다. 우리는 종교 개혁의 기치를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말씀은 그대를 죄인으로 규정한다. 그대가 서있는 자리는 심판의 자리다. 말씀은 그대를 정죄한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그대는 단독자로 하나님 만나러 가면, 예수님을 잡아먹은 뒤 가면, 그대 옷에 예수님을 악세사리로 달고 가면 <진노의 하나님>을 만날 뿐이다.

구원은 기본, 그 뒤에는 우리의 행위가 중요하다는 식의 감언이설을 믿지 말라. 하나님의 의는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타난다. 믿음에서 행위로 바뀌지 않는다. <구원의 확신> 있다고 안심하지 말라. 구원의 확신 따냈으니 말씀을 토사구팽하려 하지 말라. 당신이 먹어치운 말씀은 그대 안에서 폭발할 것이다!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의 확신이 나릉대로는 있는 사람들이다.^^ 굳이 행위를 이야기하자면, 그대가 가졌던 처음 믿음, 나는 죄인이고 내게는 생명 없지만 오직 예수 안에만 있다는 그 믿음, 그 단순한 믿음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말씀 보면 된다. 그렇게 살면 그게 <행위>다. <당위>와 <선>을 가지고 그대를 압박하는 모든 것은 율법이다.

성경 읽기는 <자기를 세우는> 자기로의 여행이 되어서는 안 된다. 좀 먹물 냄새나는 말을 빌자면, <주체를 해체하는> 읽기가 되어야 한다. 내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다. 나는 <교회>로서, 즉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예수님으로서> 성경을 읽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 시집온 며느리이자 하나님의 집에 입양된 양자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인 동시에 <집안 사람>이다―이 정체성을 꼬옥 붙들고 가야 한다(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이신칭의", "예수님을 덧입음" 등은 모두 이 정체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며느리는 아들의 신부일 때만 아들 대우를 받는다. 며느리가 독자성을 주장하면 소박맞을 뿐이다. 교회인 나는 예수님과 한 몸된 예수님의 신부다. 나는 그리스도와 합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으므로 이제 "나"라 할만한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내>가 아니라 <아들>을 볼 일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 이야기다. 예수님만 알파요 오메가다. 거기서 <내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교훈을 끌어내거나 <사회를 개혁하는> 원리를 이끌어내는 것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다. 성경 안에는 소아든 대아든 예수님과 별도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떻게?" 결국 이 질문이 제기된다. 어렵단다. 신약은 그렇다 쳐도 어떻게 구약을 아들의 이야기로 볼 것인가. 숱한 장르로 된 짬뽕에 통일성도 별로 없는 것 같고... 원, 털도 안 뽑고 잡아먹어라. 그렇게 쉬울 것 같으면... 기도하고 지혜를 구하면 된다.

그래도 가장 확실한 첫걸음은 신약 저자들이 구약을 어떻게, 어떤 문맥에서 인용했는가를 꼼꼼히 살피고 그 저자들의 눈으로 구약을 보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처음에는 문맥을 무시한 엉터리 인용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참고 묵상하라. 당신이 엉터리로 성경 읽고 있는 것이다). 역으로 구약을 인용한 신약 저자들의 컨텍스트를 인용된 구약의 결과로 본다면,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를 궁구하라―성령께서 <반드시> 가르쳐 주신다(시간은 엄청 걸린다. 내 기준으로 본다면, 한 구절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평균 6개월 정도 걸린다. 물론, 몇 년씩 걸리는 것도 있고 몇 년씩 걸려 파악하면 단 몇 초만에 같이 들어오는 구절도 있고 그렇다. 그래서 나는 이제 겨우 모세 오경 대충대충 훑고 있고 신약도 복음서, 계시록은 제대로 손도 못대고 있다). 이렇게 읽어내면 그대는 성경 저자들(선지자와 사도, 그리고 예수님)이 다같이 한 증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예수 그리스도"{더불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증거되는 아버지, 아버지(와 아들)가 보내시는 성령님이 같이 증거된다. 그래서 <삼위일체적 증거>다}. 이렇게 될 때에야, "기독교"가 우리에게 걸맞는 이름이 된다.

말씀을 <적용>하려 하거나 말씀이 주는 <위로>를 구하지 말고(물론 말씀으로 받는 위로가 있긴 하다) 그래서 말씀에서 자꾸 <나>를 보려하지 말고 말씀에서 <아들>을 찾자. 아들과 한 몸 된 신부로서, 머리이신 예수님의 몸된 교회로서 성경을 읽자. 우리는 이미 자아와 세상에 대해 죽은 몸이다. 우리가 살아있다면 그리스도 부활 생명 안에 있는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