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6, 2004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오래된 글
허세/과격/미숙함 주의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기독교 역사상 늘 논란거리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주류적인 동정녀 탄생 해석은 "마리아의 순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것은 성관계를 부정한 것으로 보고, 따라서 동정은 순결한 것이라는 도식에 따른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유구해서 아직까지도 기독교 내부에서는 굉장히 기림받는 위치에 있다. 개신교를 제외한 거의 모든 종파 안에는 이른바 "독신 서약"이라는 게 있어서 수사, 수녀를 계속 양산해내고 있다.

논리는 간단하다. 결혼 생활을 반납하고 자신을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좀더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 이런 분들의 인격은 고매해서 가까이 있으면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분들이 많다. 나는 이런 분들의 인격을 비난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많은 것을 배우고 싶다. 그러나 이런 "독신 서약"의 논리 이면에 있는 것, 그리고 그 논리가 가리고 있고 기만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왜 "성 생활"이 부정한 것이 되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좀더 일반론적인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한다.

인간의 현실은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구질구질했다. 모든 기록은 이 구질구질함을 가리는 데 봉사하고 있다. 내가 너무 비관적인가. 아니다. 사람의 인생은 나서 먹고 싸고 싸우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게 정확한 관찰이다. 모든 고매한 이야기들, 성현들의 썰들은 어떻게 하면 좀 덜 구질구질할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현실이 구질구질하기에 "덜 구질구질함"은 항상 "인간다움"으로 정의된다.

모든 지혜는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와중에 생겨난 것이다. 가까운 중국만 보더라도 공, 맹, 노, 장, 제자백가 모두 인간의 탐욕과 구질구질함이 극도에 달했던 전국 시대에 출현했다. 태평한 곳에서는 "사상"이라 일컬을 만한 게 나오지 않는다. 기껏해야 몸으로 부대껴 나온 선대의 지혜를 율법화할 뿐이다. 그러므로 항상 이 구질구질함은 "극복해야할(할 수 있는) 현실"로 미화된다. 역으로 모든 지혜는 이러한 구질구질함에 기생한다. 병이 없으면 의원이 필요없듯이 구질구질함이 있어야 지혜는 빛을 발한다.

그러므로 지혜자들에게는 "여가"가 있어야 한다. 현실의 구질구질함에서의 도피, 혹은 면제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현실에 함몰되어 끊임없이 노동하는 인간에게는 "지혜"가 생기지 않는다. 당장 몸의 생존 자체가 문제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먹을 게 남고 대신 일할 사람이 있다면 그는 곧 다른 세상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나아가서, 지혜자가 되고픈 사람은 이제 없는 여가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대신 일해줄 사람이 없으면 그는 금욕주의자가 되거나 "일=여가"라는, 요상한 변증법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놀듯이 일하고 일하듯이 논다. 범부는 일을 본업으로 하지만, 지혜자는 노는 것을 본업으로 하고 일을 부업으로 한다--이러한 도치가 "일=여가"라는 도식의 본질이다.

이 여가는 노동에 딸려오는 여러 좋은 것들을 포기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는 많이 먹지 않는다. 그는 결혼하지 않는다. 인간의 평범하면서도 가장 큰 즐거움들을 반납함으로써 여가의 값어치는 높아져 간다. 이렇게 그는 구질구질한 현실을 초월한다.

그러므로 반납하는 것의 가치가 클수록 그가 목표로 하는 세계는 고귀해진다. 그래서 거의 안 먹고 아예 결혼하지 않는 것이 가장 급수가 높다. 주는 것이 있어야 받는 것도 있다. 노동에서 멀어질수록 구질구질한 현실에서 멀어지는 것이고 구질구질함에서 멀어졌기에 "순수"에는 가까워진다.

이렇게 보면, 기독교 전통 안에서 "독신 서약"을 하는 것은 성이라는, 가장 참기 힘든 욕구를 압박함으로써 "순결한 자신"을 만든 뒤, 그 순결한 자기를 하나님께 바친다는 식의 논리를 따른다.

"동정녀 마리아"는 이런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데 소비된다. "동정녀"는 "순수 순결"이다. 순백의, 청정한 그런 인간이다. 이토록 순결했기에 그는 "하나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다, 보라, 마리아의 이 순결을...

육체를 억지로 괴롭게 함으로써 만들어내는 겸손,,, 바울이 이 거짓 겸손에 대해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전통에는 이런 거짓 겸손의 전통이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다...

복음은 인간을 순수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다. "순결에의 의지"는 "율법에의 의지"다.


그러므로 동정녀 탄생을 처녀성, 그 순결함을 예찬하는 것으로 받는다면 이건 성경을 근본부터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독신 서약이 아니라도 '자기를 하나님께 바친다'는 식의 논리는 인간 죄성에서 나오는 근원적인 욕망이다. 항상 이른바 "헌신"의 메커니즘은 작동하고 있다. 개신교에서는 독신 대신에 "사역"이 그 헌신의 메커니즘이다. 로마 교회의 사제는 독신과 사역 모두를 다 취하고 있다.

동정녀 탄생은 그 앞의 "성령으로 잉태하사"라는 구절과 그 뒤의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라는 구절과 같이 읽어야 한다(사실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 고백 전체와 같이 읽어야 한다).

이 부분은 사실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씨"에 대한 간결한 주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창세기 3장 15절은 그저 "원시 복음", 즉 첫번째 메시아 예언이라고 하고 넘어가기에는 간과할 수 없는 의미들이 담겨 있다. 우선 물어야 할 것은 "여자의 씨"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여자의 씨"는 형용 모순이다. 상식적으로도, 그리고 성경 안에서도 씨는 수컷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되어있다. 우리말과 마찬가지로 성경에서도 "씨"와 "아들", "후손" 등은 같은 의미층에 속하는 말이다. 여자에게서는 씨가 나오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처녀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 그러므로 처녀가 아이를 낳으면 할 말이 없다.^^

따라서, 남자와의 관계가 끊어져 있는 여자가 아이를 낳았다면 우리는 이 생명이 어디서 온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남자의 씨에서 끊어진 자리에서 생명을 받았다면, 남자의 생명을 물려받지 않고 "한 다른 생명"을 받아 난 자라는 것이 확증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탄생은 육체와 혈육의 생명을 물려받은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함과 능력이 이루어낸 생명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말씀의 능력이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잉태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은 "없는 데서 있도록" 불러내시는 하나님 창조의 능력을 실증한다. 이것은 죽은 자와 방불한 자인 아브라함의 사망을 뚫고 나온 이삭과 같은 차원이며 율법의 저주를 받아 끊어진 자리를 박차고 태어난 솔로몬과 같은 차원이다. 살아있으되 죽은 아담의 육체를 뚫고, "사람의 아들"로서 살아난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이렇게 보면, 그리스도의 생명은 하나님의 의와 생명의 능력이 이루어내신 생명이며, 하나님의 약속이 이르고자 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