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02, 2004

어느 강아지의 처절한 삶^^

오래된 글
허세/과격/미숙함 주의

처음에는 동물 학대인가 싶다가도,,, 그래도 재밌으니 웃으면서 봤지만,,, 폐부를 찌르는 내용이라는 생각이 든다. 좀 오버인지는 모르겠지만,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을 풍자해놓은 것으로 보이는 것은 과도한 독해일까.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은 "종의 영을 가진 자"다. 종의 영을 가진 자는 두려워하는 자다. 계시록에 보면 두려워하는 자는 새 예루살렘을 상속할 수 없는 것으로 나온다.

율법에의 의지와 율법을 두려워함은 동전의 양면이다. 율법을 수여한 절대 존재에게 재가를 받은 율법은 신성시된다. 그리고 그 신성하고 고귀한 율법은 자신을 거룩하고 고귀한 존재로 만드는 수단이 된다.

나는, 나의 양심은 한편으로는 자기를 채찍질하며 부단히 자기 부정을 함으로써 끊임없이 스스로를 타자화한다. "지금보다 더 나은 나"를 향한 몸부림은 율법을 통한 자기 정죄로 나타난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스스로를 부정하는 데 도가 트이기 시작하면 율법이 인정하고 보증하는 "양심가"가 된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율법은 신적 인정을 받은 것이기에 율법의 확증을 받은 나는 그만큼 순수해지고 거룩해진 것이다.

당근이 있다면 채찍도 있다. 달리는 자전거를 멈추지 않기 위해서 나는 끊임없이 페달을 밟아야 한다, 끊임없이... 힘이 들어 페달 밟기를 쉴라치면 가차없이 채찍이 날아든다... 채찍을 들고 나를 때리는 저놈은 누구인가. 율법(을 수여한 신)의 대리인으로 나서는 "차칸 사람", 바로 나 자신이다. 늘 "차카게 살자!"를 힘차게 외치며 나를 죽여놓는 깍두기 머리 조폭, 그는 바로 나 자신이다(롬 2:14-15).

율법에의 의지를 바탕으로 日新又日新 결단하는 나는, 또한 율법의 형벌을 두려워하는 나다. 나는 마치 종과 같이 율법의 문자 하나하나를 준수하고 율법의 문자 하나하나를 두려워한다.

나는 매일 새로워져 가는가, 아니면 표정 연기가 늘어가는가... 끊임없이 생성되는 나의 나됨과 나의 나다움은 정말 나인가...

아, 율법의 정죄가 미치지 않는 그곳은 어디인가... 그래서 정죄를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받는 그곳은 누구의 품인가... 율법이 들어오지 못하는 그곳, 차카게 사는 조폭에게서 죽고 다시 살아난 그곳, 그곳은 어디인가... 종의 영이 아니라 아들의 영을 받아 "아빠!"라고 떨린 음성으로 외쳐 부를 수 있는 그분은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