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4, 2004

성서, 다시 읽기-- 탈정경적 성서 읽기의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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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평론> 3호(2000년 봄)

성서, 다시 읽기 탈정경적 성서 읽기의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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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 발췌 & 내 비판적 주석(==>으로 표시)]

  1. 탈정경적 성서 읽기의 모색 ― 삶의 성찰의 유의미한 개입으로서의 성서 이해를 위하여

성서 읽기에서 정경주의를 극복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 접근 방식을 취할 수 있다. 하나는 정경의 범위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정경 범위가 확정된 이래 이것은 대체로 정통 그리스도 교회로부터 이단시된 신비주의적 소종파 집단들에게서 흔히 나타났던 현상으로, 가령, 말일성도교회가 '몰몬경'을 정경적 텍스트로 채택한 것이 그 한 실례다. 하지만 이와 같이 자기 종파만의 계시의 책을 첨가한 것은 변형된 형태의 정경주의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시도들을 정경주의의 극복 모색의 흔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또한 주류 그리스도교에서는 아직까지 정경의 범위 문제에 대해서 입장을 바꿀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범위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할 것은 최근 북미의 예수 연구의 부흥을 주도하고 있는 연구자들, 특히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의 작업이다. 대중매체의 대대적인 관심 아래 진행된 이 과제집단의 첫 번째 기획출간물인 {다섯 권의 복음서들}은 정경에 포함된 네 권의 복음서 외에, 최근 예수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텍스트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토마복음서를 포함시키고 있다. 이 세미나를 사실상 이끌고 있는 로버트 펑크Robert Funk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20세기의 학문적 성과를 반영하여 신약성서를 다시 만들 것을 제안하기까지 한다. 여기서 그는 주로 초기 그리스도교 문헌들 가운데서 학문적으로 유의미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들을 다수 포함한 새로운 정경을 만들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도교가 교회 중심주의를 넘어서 사회문화적으로 가치 있는 종교로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관점과 연결되어 있다. 학계와 (교회를 매개하지 않는) 대중사회에서 예수 세미나와 펑크의 위치를 감안할 때, 이러한 시도는 문제제기로서 적지 않은 파급력을 가질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일찍이 성서를 '고전'의 하나로 읽음으로써, 훨씬 급진적으로 정경의 범위 논의에 개입한 바 있다. 이것은 정경의 범위를 확장하는 완곡한 문제제기를 훨씬 뛰어넘는 가히 도발적인 제안이라 할 수 있다. 왜냐면 정경의 범위를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경계를 월장하여 문화 전반의 영역으로까지 무한히 확장한 셈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더 나아가 안병무를 비롯한 민중신학자들이 공히 전태일 담론을 신앙적 준거 텍스트로 삼음으로써, 정경 논의의 진일보를 이룩하였다. 한국의 돌진적 근대화rush-to modernization의 파행성으로 인한 대중의 고통과 해방의 염원이 담긴 텍스트로서 전태일의 담론적 효과는 분명 정경적 권위를 갖는다는 것이다. 서남동은 김지하의 {장일담}과 성서를 상호텍스트적으로 읽음으로써, 그의 성서해석학이라 할 수 있는 '두 이야기의 합류'론이 나오고, '민담의 신학', 나아가 '탈신학'론이 도출된다.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이 '오늘 여기'의 역사성 문제를 '컨텍스트'로 취급하여 정경성 문제를 우회한 데 반해, 민중신학은 이러한 물음을 텍스트-컨텍스트 논의로 접근하기보다는 또 하나의 준거적 텍스트로 수용함으로써, 정경성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민중신학의 접근은 탈신학/신앙화 프로그램의 두드러진 일면을 보여준다.

==> 저자는 "정경적 고착"을 문제삼고 있다. "정경"은 고정된 텍스트다. 그러나 "오늘 여기"는 항상 변한다. 오늘 여기를 고정시킬 수는 없다. 그러므로 정경이 변해야 한다. 그는 이것을 타파하기 위한 전략을 크게 두 가지로 본다. 정경을 양적으로 흔드는 것, 그리고 질적으로 흔드는 것. 일단 이 꼭지에서는 첫번째 전략을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저자가 핵심적으로 붙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가 드러난다. "그리스도교가 교회 중심주의를 넘어서 사회문화적으로 가치 있는 종교로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관점"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 이 입장은 저자의 글에서 일관된 것이다.

정경주의에 도전하는 두 번째 방식은, 성서 표현 양식을 고정화함으로써 의미의 고정화가 이룩된다고 믿는 정경주의적 망상에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 고정화는 실상 정경적 텍스트 전체를 꿰뚫는 하나의 본질이 있다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그런 점에서 그 '하나의 본질'은 정경주의의 해석학적 준거 역할을 한다.

그러나 성서가 하나의 본질을 갖고 있다는 전제는 오늘날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명제임이 분명해졌다. 이것은 정경주의의 치명적인 위기를 가져다주었다. 왜냐하면, 보편적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에 기반해서 주장되었던 일체의 식민주의적 폭력성은 신앙적 근거를 상실하고 만다. 요컨대 정경주의를 공공연히 문제제기하지는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는 최근 일각에서는 (특히 구약성서 연구의 경우) '정경적 비평학'canonical criticism이 폭넓은 영향력을 확대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 성서학은 이미 경전주의의 해체라는 무덤돌을 하나씩 쌓아가고 있는 셈이다.

==> 저자는 "성서가 하나의 본질을 갖고 있다는 전제"는 이미 반박된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 특히, 저자는 어떤 "보편적인 진리를 선포하는 것"을 "식민주의적 폭력성"이라고 매도한다. 이렇게 보게 되면, 성경을 정경으로 보고 거기서 이야기하는(한다고 여겨지는)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권력적인 성경 읽기다. 그리고 이런 식의 읽기는 항상 이데올로기적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나는 여기서 정경주의의 해체를 본격화하는 해석학적 방법론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 방법론은 성서 비평학에서 이항 대립하는 두 차원으로 분리되어 다루어져 왔던 것을 서로 연계된 상호의존의 과정으로 재설정하는 방식을 추구한다. 두 차원이란 '역사비평학적 연구'와 '신학적 해석'을 가리킨다. 여기서 전자는 독서자라는 '가치 중립적 존재'가 텍스트를 역사적이고 비평적으로 다룬다는 점을 함축하고 있고, 후자는 독서자와 세계 그리고 텍스트 사이의 관계를 신학적으로 문제시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 두 차원은 의미 형성의 순차적 과정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므로 후자의 관계는 '텍스트⇒독서자⇒세계'라는 의미 확산의 경로를 이야기하는 셈이 된다. 요컨대 후자의 표현에 담긴 '해석'이라는 말은 대화적이라기보다는 수직적이고 계서적이다. 반면 나는 이 두 차원을 성서 텍스트의 '표현 양식에 주목하는 것'과 텍스트에 대한 '독서 양식에 주목하는 것'이라고 재설정함으로써 양자는 필연적으로 연계되어 있으며, 특히 그 관계를 쌍방화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텍스트를 통한 의미 형성이 '대화적 구조'를 갖는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 무지 어렵게 써놨는데, 간단하게 말하면 이거다. "역사 비평학적 연구"란, "최종적인 형태의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세월 지나면서 몇 가지 문서군(群)을 바탕으로 짜깁기한 결과물"이라는 가정 하에 "원래" 문서군을 "복원"하자는 연구 방향이다. 이런 작업 후에야 좀더 충실한 "진짜" 텍스트가 나온다는 말이다. "신학적 해석"이란, 성경 독법도 여러가지고 읽은 뒤 적용하는 방법도 여러가지라는 말이다.

저자에 따르자면, 기존에는 독자가 최대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역사 비평학적 방법으로 연구해서 일단 텍스트를 충실히 복원한 뒤, 주관을 가지고 읽어 해석하는 방식을 취했다. 순서가 정해져 있었고, 객-주, 텍스트/독자-독자/세계 등 딱 나누어져 있었다. 이 방법은 일방적이다. 신학적 해석이 역사 비평학적 연구 방법에 개입할 수 없었다. 저자는 이 일방성을 없애자는 것이다. 신학적 해석이 텍스트 규정 작업에 참여하자는 말이다.

그래서 저자는 "역사 비평학적 연구"를 "텍스트의 표현 양식"이라 하고 "신학적 해석"을 "독자의 독서 양식"이라 재명명한다. 텍스트는 객관적인 탐구대상이라기보다는 텍스트 역시 누군가가 의미를 표현한 것이며, 독자는 그 의미에 반응하고 나아가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방식으로 읽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의미 창출의 구조를 일러 "대화적 구조"라 명명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지할 것은 성서의 표현 양식 속에는 다양한 사회문화적인 차이들이 함축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성서는 역사적 층위가 상이한 원텍스트들의 퇴적층을 담고 있다. 상이한 시기는 서로 다른 사회문화적 맥락을 전제한다. 또한 성서에 포함된 여러 텍스트들은 장르상으로나 저술가적 관점으로나 천양의 차이를 갖고 있다. 가령 시적 텍스트가 있는가 하면, 역사서술적 텍스트가 있고, 또 예언적 텍스트가 있는가 하면, 지혜적 텍스트가 있다. 은유가 표현 방식의 중심을 이루는 것과 설득적 설명이 주를 이루는 것, 그리고 공적이고 역사철학적 기술과 사적이고 도덕철학적 기술 사이에는 상이한 의미화 전략이 들어 있다. 또 예언자와 사제 그리고 정치가의 언술들이나, 지배당파와 도전당파의 수사는 표현 양식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의미를 구성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밖에도 등장인물의 성별도 표현 양식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 또 그 텍스트들의 공간적 배경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차이들은 텍스트에 감추어진 사회문화의 차이를 진지하게 고려할 것을 요청한다. 가령 사무엘기 텍스트에서 사울과 다윗에 관한 표현에서, 다윗은 약탈자로서 활동하기도 하고 야훼 제의를 임의대로 주관하기도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그것이 그의 지도력에 문제로서 비판되지 않았다. 반면 사울은 바로 그것이 그의 실패의 결정적 요인으로 비판받고 있다. 이러한 이중적 기술에서 우리는 해석의 어떠한 중심점도 발견할 수 없다.

==> 과연 그런지 생각해볼 일이다. 성경의 일관성을 윤리 등의 "사회 문화적 맥락"에 두면 당연히 성경에는 일관성이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이 일관성 없음이 바로 저자와 같은 입장을 취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을 찬찬히 살펴보라. 성경에는 자체로 해석의 틀을 제공하고 있다(자세한 논의는 이후에).

먼저 우리는 텍스트 속에 함축되어 있는, 동시대 인물인 두 사람간의 사회문화적 차이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반군주제적 기조의 지파동맹 사회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지파(베냐민 지파)의 일원인 사울과 소외된 변방 지파(유다 지파) 출신 다윗 사이의 차이가 그 한 이유일 수 있다. 또 그 사회를 대표할만한 훌륭한 가문 출신으로 지파동맹의 지도자로 추대된 인물 사울과 보잘 것 없는 가문 출신으로 무뢰배들을 거느리고 다니는 '주먹파 보스' 다윗이라는 사회문화적 차이도 고려해야 한다. 한편 이런 공시적 차이만이 아니라, 통시적 관점도 적용할 필요가 있다. 두 인물의 활동 시기가 지파동맹 해체기였다면, 이 텍스트의 초기 형태가 문서화된 시기는 군주국 초기였다. 그런데 이 나라는 다윗 가문에 의해 통치되던 나라다. 그러니 역사적 정보를 해석할 때 두 인물에게 이중잣대가 적용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이상의 사회문화적 차이는 두 인물에 대한 텍스트의 표현 방식의 차이를 노정하는 데 관여하고 있다. 이것은 기어츠C. Geertz나 단턴R. Darnton 류의 '두터운 묘사'thick description 방법에 의거한 역사적 분석에 속한다. 이러한 방법은 끊임없이 텍스트에 함축된 상이한 사회문화적 차이들을 찾아냄으로써 텍스트의 의미구조를 읽어내는 데 유용하다. 여기서 역사가로서의 텍스트 해석자는 끊임없이 새로운 차이의 관점을 찾아냄으로써 언제나 창조적으로 텍스트 읽기에 개입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의미화는 결코 종결을 지향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계속된 텍스트에 대한 차이의 물음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차이들에 대한 문제의식은 독서 양식과 관련되어 있다. 즉 독서가 어떤 사회문화적 맥락과 접속되어 있느냐에 따라 상이한 문제의식이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와, 사라의 몸종이자 아브라함의 첩인 하갈에 관한 창세기(16,1~16; 21,9~21)의 텍스트를 보자. 이 이야기에는 사라와 하갈의 운명이 새옹지마塞翁之馬식으로 역전되는 상황을 그려져 있다. 여기서 운명의 계기는 남편(아브라함)이 어느 편을 들어주느냐와 남자아이를 누가 낳았느냐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즉 텍스트 속에는 배제주의적 성의 문제가 일관된 사회문화적 맥락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남자인 아브라함의 모습은 중립적인데 반해, 두 여자는 투기하는 부정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 또한 성적 편견의 사회문화적 맥락을 함축한다. 또한 여기에는 주인인 사라와 종인 하갈, 이스라엘 여자 사라와 에집트 여자 하갈, 이스라엘의 조상[大母]이 된 사라와 광야의 야만적인 부랑자 족속의 조상 하갈이 대립되고 있다.

만약 독서자가 성별의 문제에 초점을 두면서 세계와의 접속을 모색하고 있다면, 이 텍스트를 그는 성적 배제주의의 시각에서 읽어낼 수 있다. 또 그가 지방색에 주목한다면, 하갈과 사라의 텍스트 이면에 깔린 종족간 갈등을 유념하면서 이 텍스트에서 의미를 구성하려 할 것이다. 반면, 그가 계급적 관점에 주목하고 있다면, 주인과 종이라는 사회적 관계를 더 천착하면서 텍스트를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읽기의 가능성은 독서 양식이 텍스트의 표현 양식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해석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그리고 이러한 읽기는 정경주의를 해체하고, 단 하나의 보편적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세계와 연계된 자신의 신앙적 성찰을 위한 성서의 목소리'들'을 들을 수 있게 한다. 이 경우 우리가 성서의 권위를 주장할 필요가 있다면, 그 권위의 근거는 이러한 삶의 성찰에 개입하고 있는 성서의 존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세계와 접속함으로써 생기는 성서의 권위는 사실 권위라 할 수 없다. 이런 권위는 오히려 사서삼경이나 불경이 훨씬 더 있다. 이런 경전들은 적어도 "세상"에 대해 일관성 있게 접속하는 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군더더기 주제 없이 삶 그 자체, 순수 삶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서는 삶을 성찰기에는 너무 "잡다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삶만 성찰하면 좋았을 것을, 하나님 이야기, 예수님 이야기, 이스라엘 망국사, 심판 등등의, 삶을 성찰하는 데 군더더기로밖에 볼 수 없는 것들을 너무 많이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런 모든 내용을 "삶의 성찰"로 꿰내기 위해서는 "창조적"이고 "대화적인" 해석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 심판, 죄 등의 모든 소재들을 "삶"이라는 화두에 맞추어 읽어내야 하기에 얼마나 독창적이어야 하겠는가!

그렇다면 성서가 다성多聲적 텍스트라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다성적 세계인 우리의 생활 공간과 연계된 의미를 성서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성서는 삶의 성찰을 위해 신앙적 이해의 가능성으로 우리와 마주할 수 있다. 그런데 정경으로서의 성서는 그것을 방해한다. 그리고 정경으로서의 성서는 교회 중심주의와 결탁되어 있다. 여기에 교회로 실존하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게 되며, 탈정경적 성서 읽기는 '교회를 넘어 예수에게로!'라는 구호를 내지르고 있다.

==> 굳이 예수일 필요가 있는가. "삶의 성찰"을 위한 책은 성서 말고도 수두룩하다. 인류의 지혜를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보지 말라. 저자의 방식대로라면 굳이 예수라 할 수 있는 근거는 "마니아적 집착"일 수밖에 없다.
저자가 말한 대로 성경에 "다양한" 접속 방식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권위를 실어주는 게 아니라 권위를 떨어뜨린다. 저자는 상당히 긍정적이라서 이런 성경의 특징을 "다성적"이라 한다. 그러나 "다성(多聲)적"이라는 말은 뒤집어 이해하면 "무성(無聲)적"이다.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성경의 일관된 메시지를 추적하는 정경적 독법은, 저자의 말을 빌자면, "삶의 성찰을 위한 신앙적 이해의 가능성을 방해한다."
저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명확하다. 딱 까놓고 말하면, "성경을 내 입맛대로 읽겠다"는 말이다. 저자는 이미 간파하고 있다. 성경의 정경화가 일관된 해석 논리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그리고 저자는 정경을 이루어낸 그 "특정한 해석틀"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