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7, 2004

영화 ‘패션오브크라이스트’를 보고

오래된 글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요일4:2)

식목일에 영화 "패션오브크라이스트"를 봤다. 성경을 철저하게 고증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졌거니와 적어도 겉모습에서는 그러했다. 그런 측면에서는 잘 만든 영화였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의 마지막 열두 시간의 고난을 나도 줄곧 묵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슴을 진정시키고 딴지를 좀 걸어보고자 한다.

1. 사탄

영화에서는 마귀(혹은 사탄)가 한 인격체로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러한 마귀 이해가 과연 올바른지 궁구해봐야 한다. 성경에서는 "마귀"라는 별도의 인격체보다는 "마귀스러움"이 부각된다. 마귀스러운 놈은 다 마귀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도 마귀고 예수님을 시험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도 마귀의 자식들("너희 아비 마귀")이고 예수님을 뜯어말린 베드로도 사탄이다("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그러므로 마귀를 실체화시켜 한 인격으로 고정시켜놓은 통속적인 이해는 그르다. 마귀는 뿔 달리고 화살 꼬리 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럼 마귀스러움은 어떻게 판가름되느냐. 바로 "말"이다. 어떤 말을 듣고 어떤 말을 하느냐 하는 것이다. 공중 권세 잡은 자와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의 말을 듣는 사람은 사탄의 말을 듣기에 사탄의 말을 한다. 그러므로 사탄스럽다. 그러니까 마귀 자식이다.

그럼 마귀스런 말은 어떤 것이냐. 바로 땅만 보게 하는 것이다. 피조계로만 눈을 돌려 흙만 파먹고 살게 하는 것이다. 마귀의 세 가지 시험은 이 차원에서였다. 돌을 떡으로 척척 만들어내는 메시아, 성전에서 뛰어내려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메시아, 권력과 재물을 펑펑 모을 수 있는 울트라수퍼캡숑짱 메시아. 항상 메시아는 생존 내지는 복지, 도덕, 정의(正義)의 수준에서 정의(定義)된다. 이런 게 마귀가 제시하는 메시아 상(像)이다. 이런 그리스도가 바로 "적그리스도"다.

그러므로 거짓선지자는 이런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말하여 벌어먹고 사는 선지자다. 어떻게 세상에서 잘 사느냐 하는 문제가 거짓선지자에게는 관건이다. "잘 사는 것"은 돈 많이 버는 것일 수도, 단아한 생활을 하는 것일 수도, 정의 사회 구현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들이 설교하는 메시아는 세상을 위하고 세상의 빵구난 부분을 땜방하는 분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은 마귀로부터 시작하여 바리새인, 사두개인, 제사장, 이스라엘 민중들까지 일관되게 요구했던 메시아 상을 거부했기에 십자가에 못박혔다. 예수님은 율법 위반자, 신성 모독자, 민족 반역자였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있을 때조차 예수님을 시험했다. "네가 메시아이거든 뛰어내려 보라!"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를 박차고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면, 그들이 원하는 메시아로 나타나주기만 했다면 그들은 엎드려 경배하고 예수님 무릎 아래서 낮은 포복으로 기며 "어디든지 가오리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섬김과 예배의 몸짓 아래에는 거대한 생존의 욕망이 꿈틀대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삼지 않고 나름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이 세상은 "온 세상을 꾀는 자" 아래 처해 있다. 세상은 거대한 거짓말 아래 있다. 일부러 속는다. 생존을 위한 것만 들으려 한다. 오직 예수님을 생명으로 알아먹는 자만이 진실 안에서 사는 자다. "진실을 알지니 진실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러니까 영화에 나오듯 머리 빡빡 깎은 그놈만 마귀가 아니라 예수님을 못박은 온 세상이 마귀다. 영화는 "마귀"라는 바디라인을 딱 그어놓고 관객은 그 밖에 있으면서 십자가 고난을 구경하는 위치에다 박아버린다. 그러나 아는가, 너와 나는 구경꾼이 아니라 침 뱉고 채찍 때린 놈이라는 것을,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놀린 놈이라는 것을, 돌을 떡으로 만들어보라고 간절히 기도하던 마귀라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은 마귀스런 놈들, 진노의 자식들을 독생자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다시 살려 새 사람으로 만들어내는 사랑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2. 고통의 문제

영화는 사53:4 말씀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잘 아는대로 "극사실주의"의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묘사한다. 이러한 영화의 기법은 고통이 주는 충격을 극대화시킨다. 이러한 묘사는 극한 고통을 받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강력한 동정과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시청각을 통해 강력하게 감정이입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영화를 통해 간접적인 방식으로는 최대한 진짜같이 그리스도의 고통을 체험한다. 여기에 함정이 있다.

우리는 해마다 고난 주간을 지키며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린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여러가지 모양으로 유비된다. 가장 흔한 것은 몇 끼 금식하는 것이고 좀 나아가면 주로 기아와 전쟁으로 허덕이는 사람들과 교감하는 것 등이다. 일신(一身)의 차원에서 시작해서 전지구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고통으로 이해된다. 고난은 고통이다. 어느 고통이든 고통에 동참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유비하여 실체화시킨 것이 된다. 그리고 실체화된 고통에 참여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 것이 된다.

고통(불교 용어로 하면 "苦"다)은 기존 현실이다. 인간은 세계에 존재하는 고통을 악한 것으로 여긴다. 따라서 고통은 세계의 구멍이다. 메워도 메워도 다 메울 수 없는 구멍... 이것이 고통이다. 묻자. 그리스도의 고난은 고통으로 해소될 수 있는가.

우리는 먼저 고통의 기원을 물어야 한다. 고통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물론, 죄는 인간이 지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심판으로 사망을 세상에 풀어놓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독자적으로 사망과 고통을 제거하고자 하는 모든 활동은 (하나님께 반항하는) "죄"로 정의된다.

인간 실존이 고통을 당하며 사는 것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 굳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도 누구나 고통을 당하고 산다. 또, 십자가형이 엄청나게 고통스럽다는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설명하고자 한다면 굳이 십자가형이 아니라도 웬만한 고대 죄인들은 엄청난 고통을 당하면서 죽었다. 십자가 형벌이 물론 육체적으로 아주 고통스럽긴 하지만 웬만한 고대 형벌들은 모두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것들이었다. 살가죽을 조금씩 시간을 끌며 벗겨죽이는 능지처참, 삶아 죽이는 팽형, 톱으로 켜서 죽이기, 창자를 칭칭 감아 빼내기 등등은 모두 육적으로 정신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주는 형벌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극심한 고통"으로 차별화시키려 한다면 헛수고다.

그리스도는 "苦짱"이 아니다. 세상 누구보다도 큰 고통을 당했다는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이해해서는 그리스도 고난의 의미를 영원히 놓치게 된다. 물론,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셨기에 육체적 고통 말고도 하나님과 분리되는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이건 어느 고통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고통이다"라는 식의 반론을 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고통 당하는 그 순간만큼은 모든 개체는 평등하다. 하나님에게 분리되는 고통이든, 살가죽이 천천히 벗겨지는 것을 눈뜨고 보는 고통이든 똑같이 처참하고 절망적이다.

그러므로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인간이기에 당하는 고통의 맥락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이해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아무런 새로운 의미를 갖지 않는다. 여기에 "우리 죄들을 위한"이라는 수식구를 갖다붙여도 마찬가지다. 그 "우리 죄들"이 "인간이기에,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짓는 죄들"이라면 말이다. 이 죄 역시 고통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사망을 세상에 풀어놓았기에 모든 인간이 다 당하는 기존 현실이다. "누구나 열심히 선하게 살려 하지만 잘 안 되어서 죄들을 짓는다, 이 죄들을 대속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우리 대신 고통 당하셨다." 이런 고난 이해는 무지 천박한 고난 이해다(불행하게도 대중적인 이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이러한 기존 현실을 생명으로 삼고 한 치도 양보하지 않으려는 인간 죄성에서 출발해야 한다. 인간의 고통과 도덕적 불완전을 땜빵하는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이해하려 하는 것 자체가 벌써 기존 현실을 빙 둘러 긍정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땅으로 흡수하는 것이다. 세상의 기존 현실을 땜빵하는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이 이해되기에 그의 고통이 부각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은 땅에서 난 고난이 아니라 하늘로서 임한 고난이다. 그의 고난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당하는 그런 고통이 아니다. 그의 고난은 땅이 생명으로 여기는 현실을 사망으로 규정함으로써 생긴 고난이기에 유일무이하다. 빵꾸난 부분들을 땜질하여 그럭저럭 꾸려가려는 그 가련한 몸짓들을 "무(無)!"라고 선언하심으로써 당한 고난이다. "오직 나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단언하심으로써 당한 고난이다. 마음을 비우고 성경을 읽어보라.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항상 우리에게 그런 양식을 주소서!"라고 절규한 민중들의 외침이 과연 불의한 것이었나를. 로마의 압제에 시달리던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라는 그 요구가 부당한 것이었나를. 그러나 예수님은 거절하셨다. 그러므로 이런 이유로 예수님을 못박은 세상의 논리대로 보면 십자가 고난은 나름의 정당성을 가진다(그가 그리스도라 하지 않았으면 모르되, 그가 왕이라고 하지 않았으면 모르되). 맹자는 백성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면 제후도 갈아치우고 왕도 갈아치우고 심지어 제사지내던 귀신도 갈아치우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의 고난은 세상의 기아와 전쟁에서 나오는 고통과 동일시될 수 없으며 금식에서 나오는 배고픔과 동일시될 수 없다. 또, 고통을 느끼는 것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차원이다.

3. 동정과 연민의 문제

따라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은 고통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고통과 똑같은 고통을 겪고 세상의 악과 고통에 깊은 분노와 연민을 느낀다 하더라도, 나아가 그리스도의 고통을 직접 함께 겪는다 하더라도 이것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니다. 눅23장에 보면 예수님은 당신을 따라오는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를 보고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라고 나무라시며 심판을 경고하신다. 끔찍한 일을 당하는 예수님에 대한 연민은 그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

영화는 베드로의 부인을 경황 없는 중에 이루어진 실수로 보고 있다. 하지만, 성경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이 재판 받는 와중에 느긋하게 불을 쬐고 있었다. 고통 당하는 스승에 대한 연민, 혹은 예의 때문에 그는 뜰에서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더 이상 믿고 있지 않았다. 세 번 부인한 것은 이러한 베드로의 상황을 확증한 것이다. 그 상태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함으로 당할 운명을 당시의 그로서는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세 번 부인한 뒤 닭은 울고... 그 역시 운다. 이 울음의 정체는 불쌍한 스승, 과대망상이 있었지만 십자가에 죽을 정도의 죄인은 아니었던 정든 선생님에 대한 연민의 울음이다. 회개의 울음이 아니다! 제자들에게 제대로 믿음이 들어간 것은 예수님이 부활한 뒤 한참 지나 예수님을 직접 보고 예수님께 한따까리 당하고 난 뒤였다. 그 전에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지도 않았다(막16:14).

그러므로 베드로나 가룟 유다나 같은 상태였다. 가룟 유다는 좀더 양심이 강한 사람이라서(혹은 좀더 율법의 의가 강한 사람이라서) 스스로의 양심을 못이기고 자살했다. 그러므로 베드로를 어여삐 여기는 영화의 시각은 "그렇게 보고 싶은 것"일 뿐이다.

이러한 맥락은 두 마리아(막달라, 예수님의 어머니)에게도 해당된다. 특별히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성모"라는 말을 붙이지 않겠다)는 폭발적으로 발출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모두 빨아들이는 존재로 나온다. 여기서도 "그리스도 고난에 동참함"을 육체에 연결시키는 것을 보게 된다.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가까운 혈육인 어머니이기에,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의 어머니이기에(영화는 로마가톨릭의 전승에 충실하여 마리아에게 아들이 예수님 한 분만 있었던 것으로 묘사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가장 근사하게 함께 겪는 존재로 나타난다. 아들이 고통 당하는 것 일거수 일투족을 일일이 옆에서 끝까지 봐가며 아들과 (거의) 동일한 고통을 겪는 존재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의 구도는 이렇다--살찢기고 피흘리며 고통에 겨워 몸부림치는 그리스도가 있다. 그리고 그 고통을 똑같이 겪으면서 참아내는 마리아가 있다. "아버지"인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고통으로 내몰고 "어머니"인 마리아는 그리스도와 함께 아파한다. 이렇게 마리아는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표현하는 매체로 등장한다. 하나님이자 사람이신 예수님의 "부모님"은 한편으론 강직하고 한편으론 자애롭다.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의 야박함은 마리아의 자애로움에 의해 보충이 된다. 가상칠언 중 하나인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는 즉시 마리아의 자애로움에 의해 보충된다. 하나뿐인 아들을 내다버리고 학대한 아버지 하나님 상(像)을 견딜 수 없는 인간은 마라아로써 부족분을 채워 넣는다. [그러나 우리는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신 예수님의 마음을. 진짜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버리셨다.]

이렇게 마리아는 인간으로서 신성(神性)에 참여한다. 마리아의 그 자애로움, 그 한량없는 모성은 신성의 일부가 된다. 어머니 마리아와 거의 같은 마음을 가진 막달라 마리아 역시 신성에 참여하고 이 마리아들의 마음을 공감하며 함께 아파하는 우리 역시 마리아를 통해 신성에 참여한다. 한편으론 예수님과 일체가 되고 한편으론 하나님과 일체가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고통은 이 모두를 엮어준다. 고통을 통하여 신인합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되고 인간은 하나님이 된다.

마귀 역시 이런 사실을 알기에 희한하게도 그리스도의 고난을 뜯어말리는 존재로 나타난다. 겟세마네 기도에서 그리스도가 고난을 향해 갈 때 마귀는 그를 만류한다. 고난을 당할 때 줄곧 마귀는 그리스도가 고난에서 뛰쳐나오지 않나 하는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마지막에 그리스도가 "다 이루었다" 하니까 마귀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한다. 이렇게 고통은 찬미된다.

하지만 고통은 나쁜 것이다. 그리스도를 죽인 놈들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고난을 수종든 도우미들이 아니라 때려죽일 죄인들이다. "저들을 용서해주소서.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기도가 없었다면 빼도박도 못하고 그대로 심판받을 존재들일 뿐이다. 마귀도 예수님을 죽이는 편에 서있었지 예수님이 고난을 받는 것을 반대하는 편에 서있었던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의미를 알았다면 결코 예수님을 죽이지 못했을 것이다(그러므로 무지를 사해 달라는 기도를 예수님이 올리신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마귀는 그렇게 전지전능하지 않다. 사탄의 시험이 뒤에 나타나는 (서기관, 바리새인, 민중들의) 시험들의 전형(典型)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예수님을 못박은 자들의 마음은 곧 마귀의 마음이다. 이러한 시각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은 고통이 찬미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고통은 결코 찬미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처럼 고난 당한 교회를 위해 하나님은 "복수하시는 하나님(고엘)"으로 나타나실 것이다. 복수는 당한 일이 악하고 원통한 것이었다는 전제가 있어야 성립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죽인 피값을 찾는 심판을 언젠가 하실 것이다. 고통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좋고 나쁜 일도 되도록 비켜 가는 게 좋다. 메저키즘은 정신 건강에도 육신의 건강에도 다같이 좋지 않다. 바울의 말대로,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다"(골2:23).

교회가 당하는 고난은 세상에서 나지 않은 고난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유일무이한 고난이었듯 교회의 고난 역시 그런 식으로 유일무이한 고난이다. 그리스도와 동일한 마음과 생각을 가졌기에 겪는 고난이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교회의 고난과 마땅히 당해야 할 비난을 혼동하지 말라고 한다(벧전2:20, 4:15). [웃기는 게, 한국 교회는 베드로 사도의 이 권면을 완전 무시하고 있다. 저거가 잘못해서 먹는 욕을 무슨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미화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거의 몸소 겪고 그의 아픔을 거의 몸소 체험했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아니다. 즉 동정과 연민, 함께 겪음 등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본질이 될 수 없다. [이런 동참은 옛날에는 신비주의의 방법으로 했었는데 이제 멜 깁슨이 첨단 장비로 모든 사람에게 개방해놓았다.]

따라서, 예수님의 고난을 고통과 동정(동참)의 문제로 이해하려는 것은 예수님을 "두 번 죽이는 일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