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글
허세/과격/미숙함 주의
작금의 현실에서 '비전론'에 대한 비판을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른바, 현대 (시민적) 기독교는 젊은이들에게 비전을 심어주는 것을 무슨 절대절명의 과업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 젊은이들에게는 비전이라는 것은 절대절명의 그 무엇이다. 비전에 살고 비전에 죽는다. 꿈에 살고 꿈에 죽는다. 환상에 살고 환상에 죽는다.
비전은 일단 거창해야 한다. 그래야 비전이다. 소시민적 소박하고 단순한 비전은 비전이라 할 수 없다. 어떤 정도로든, 소박하게든 거창하게든 그 비전에 등장하는 주인공 - 나는 영웅이어야 하며, 그 비전에 등장하는 신은 내 소원을 다 이루어주며, 나를 적당한 수준까지 연단시키지만, 기본적으로는 사랑이 넘치는 그런 신이어야 한다. 조련사같은, 램프의 지니같은 신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비전에 수반되는 것은 열렬한 기도이다. 기도로 모든 것이 좌우된다. 기도는 그 비전을 이루어내는 자신의 노력의 성례(聖禮)이다. 그래서 기도는 기도 자체보다는 (많이) 기도하고 있음이, 그리고 열렬히 기도함이 중요해진다. 이런 맥락에서 노력이 뒤따르지 않는 기도는 비난된다. 기도와 노력은 함께 가야 짝이 맞다.
누구나 '비전에 대한 도전'을 받는다. 웬만한 젊은 기독교인이라면 '믿음의 분량대로' 소박하거나 거창한 비전이 있다. 소박한 영웅이거나 거창한 영웅이다. 우리는 하나님 백성이기 때문에 영웅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이 뒤를 봐 주실 거다! 세상을 힘으로 누르고 이기는 것이 승리하는 거다! 여호와 하나님, 아니 여호와 하나님 힘을 입어 세상을 정복하는 우리 만만세!
하지만, 현실은 그러한가. 악인과 선인에게 해를 공평하게 비추시는 하나님은 기독교인 가운데서도 가난한 자와 눌린 자를 두신다, 아니 부자가 없다(마 19:24, 막 10:25, 눅 18:25, 딤전 6:7-10). 만약, 예수만 믿으면 하나님의 해가 우리에게만 비추고, 그래서 우리 밭에서만 소출이 풍성하다면 우리는 굳이 전도의 미련한 방법을 쓸 필요가 없다. 그저 우리 위에만 떠 있는 해를 손으로 가리키면 된다. 하지만, 하나님은 들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다. 예수님은 요란하지 않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모두 사회적 지위가 높고 사회의 부의 대부분을 가지고 있다면 그 기독교가 그리스도의 제자단이 맞는지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된다. 물론, 대답은 부정적으로 나온다. 오히려 예수님의 모습은 가난함, 낮아짐, 종됨, 섬김과 비슷하다.)
결국, 모든 젊은이들에게 영웅적인 비전을 심는 것은 허구이다. 속임이다. 세상을 재료로 하여 만들어내는 비전메이커들의 작품이다. 그것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기에 쉽게 그 유혹에 넘어간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한 비전을 쉽게 자신의 것으로 삼아 버린다. 그리고 그 비전을 이루지 못하면 평생 응어리진 마음으로 살아간다. 탐심은 고통이다. 그리고 사망의 향기를 낸다.
탐심과 그에 기생하는 유혹을 근본원리로 해서 돌아가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독교 역시 비전이라는 이름 하에 자본주의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한다. 세상에서 좋다고 해서, 정당화되었다고 해서 수용할 수 있는 것인가. 자본주의가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정당화시킨 모든 것들을 우리도 그저 수용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영웅이 되기 위해서(부자가 되기 위해서) 모든 다른 것들은 맘몬에게 주어야 하는 이 현실을 그대로 긍정하고 나가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맘몬과 하나님은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이 맘몬은 아주 교묘해서 비전을 적당히 고상한 수준으로 포장한다. 물질적 탐욕이 있는 사람에게는 물질을 강조, 명예욕이 있는 사람에게는 명예욕을 강조, 신앙욕이 있는 사람에게는 신앙욕을 강조, 그리고 그 나머지는 고상하게 포장한다. 하지만, 모든 것은 거래와 주고받음의 법칙에 종속되어 있다. "믿음 역시 행위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 표어가 되고 여기서 "행위"는 맑스가 ≪자본론≫에서 규명환 "화폐"가 된다. 신앙은 행위로 계량화되고 신앙의 가치는 행위로 환원되고 측정된다.)
우리의 비전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우리가 죽인 예수의 죽으심을 지고 가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우리의 비전이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면 된다. 예수님의 눈으로 삶을 보고 예수님의 탄식으로 탄식하고 예수님의 기쁨으로 기뻐하면 된다. 영웅 예수, 그리고 그에 묻어나서 같이 영웅이 되는 내가 주인공인 신화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예수,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죽은 바 된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 비전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죽는 것이다.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한 자, 그의 부활에 동참하리라. 세상에서 드러나고 튀는 인생이 아니라, 감추이고 살해되는 인생이다. 내가 세상에 대하여 죽었기에, 세상을 재료로 만들어지는 비전에 대해서도 죽었다. 탐심으로 똘똘 뭉쳐진 허탄한 신화를 벗어버리고 하나님 나라를 살아야 할 것이다. 마라나타!
추신> 그렇다고 이 이야기들을 무슨 금욕주의적 관점으로 이해하지는 마시길... 우리는 소위 '세상적으로 성공'한 자들이 될 수 있다. 세상에서 실패한 것 자체가 구원의 빙거는 아니다! '가난' 그 자체를 의로 여기면 이것이 또 다른 율법이 된다.
중요한 것은 가난하든 부하든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사는 것이다. 스스로의 믿음을 이용하려 하거나 예뻐 보이는 그 무엇으로 바꾸려는 시도를 모두 그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