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7, 2004

자기 부인에 대하여

오래된 글

인간 조건은 자기를 부인하도록 되어있다. 금욕만 자기 부인이 아니라 열심히 노력하여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것 역시 자기 부인이다. 양자 모두 "지금의 나"를 극복하고 "더 나은 나"를 향하는 몸부림이기 때문이다. 금욕하는 사람이든 열심히 뛰어다니는 사람이든 기본적으로 "일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면벽 참선하는 스님이나 사장님이나 본질적으로는 같다.

스님이나 수도사는 "출가"를 한다. 세속에 속해 있는 옛 집(家)을 버림으로써 더 나은 집을 욕망한다. 그는 세속을 떠난다. 그가 사는 산은 "세속이 아닌 곳", 즉 더 이상 이 세상이기를 포기한 곳을 상징한다.

사실, 천상천하 세속이 아닌 곳이 어디 있겠는가. 결국 인간의 발길이 닿는 그 모든 곳은 세속이 되지 않았던가. 사람 밖에서는 세속 아닌 곳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자기 안으로 들어간다. 오직 마음 안, 그곳이 탈속의 영역이리라. 그는 이렇게 세속에 있지 않음을 보임으로써 더 나은 곳에 있다고 스스로 선포하고 있다. 자기의 모든 것을 주고 다시 모든 것을 받으려는 염원이 이 출가에는 어려있다. 悲願解脫... 실상 그는 세상에 없지만 세상에 강력하게 있다. 실상 그는 자기를 부인한 것이지만 강력하게 자기를 긍정하고 있다. 옷에 난 구멍은 단박에 눈에 띈다. 구멍의 없음은 구멍의 있음을 강력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알리바이는 그곳에 없음으로 다른 어느 곳에 강력하게 있음을 증명한다. 따라서 모든 출가는 알리바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 부인을 말씀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기독교가 시작된 이래로 지금까지 대세는 이 자기 부인을 알리바이로 해석해왔다. 수도사들은 결혼하지 아니하고 열심히 노동하여 알리바이를 만들어냈다. 종교권력자들은 끊임없이 더 좋은 나를 추구함으로써 알리바이를 만들어냈다. 열정적인 신앙인들은 내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 일함으로써 알리바이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알리바이들이 가 있는 그 다른 곳들에 예수님은 계시지 않는다.

몸을 밝히는 것은 눈이다. 예수님은 참 빛이시다. 참 빛을 보아야 눈이 밝아지고 몸이 밝아진다. 이 참 빛 옆에서 해 아래 있는, 햇빛을 받으며 있는 모든 것들은 어둠이었음이 폭로된다. 모든 알리바이들은 그늘에서 양지로 가는 몸부림들이다. 그러나 양지나 그늘이나 모두 해 아래 있다. 사람의 시선은 모두 해 아래서 머문다. 억겁 세월이 지난다 해도... 육도전생을 되풀이 한다 해도...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 1:3, 9, 14). 그러나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 해 위에 계신다.

존재는 수수께끼다. 수수께끼는 풀어라고 있는 것이다.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 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눅 8:17). 왜 만들어진 것들은 없지 않고 있는가. 왜 사람은 영원히 살지 않고 죽는가, 그래서 모든 안 좋은 것들이 여기서 비롯되는가. 왜 세상은 그저 "좋음"이 아니라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것일까. 아니, 오히려 나쁜 것들이 지배적인 것일까. 모두 오답을 내놓았다. 누구도 죽지 않을 수 없었다. 정답은 무엇일까...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6-27).

해 아래서 해 아래로 자리를 옮겨 다녀서는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다. 자기가 옮겨간 자리를 그리스도 안이라 아무리 우겨도 우긴다고 되는 게 아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부인하고 자기의 행위조차 모두 하나님의 일이라 우기고 믿어도... 내 재산과 명예와 학벌과 내 모든 것을 똥으로 여기고 오직 그리스도만 좇는다 하더라도... 결국 돌아돌아 내가 열심히 일했기에 나를 하염없이 받아주고 나를 끝없이 사랑하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만난다면 그것은 나를 세우는 것이다.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에 너무 감격해서 열심히 일하는 내 행위와 열심을 어여삐 여겨 받아주는, 인정해주는 그런 하나님을 만난다면 그 하나님은 해 아래 있는 하나님이다(보답과 감사는 다르다). 나를 죽이는 그리스도, 그가 진짜 그리스도다. 나를 인정하지 않는 그리스도, 차디차게 외면하는 그리스도... 그 몰인정과 그가 던지는 십자가 속에서 그의 사랑을 발견하는 자... 나를 무너뜨리고 당신을 주시는 그 사랑을 아는 자... 그가 진정 그리스도를 아는 자다. 내가 무너지기 싫기에, 내 행위가 부정되기 싫기에 사람들은 오시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리스도 때문에 세상 밖, 만물 밖으로 나간 자다. 그리스도는 해 아래, 만물 안에서 뵐 수 없는 분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 안에 있지 않고 하늘에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있다.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엡 1:20).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자기와 자기가 속해 있는 만물을 부인하는 것, 이것이 참된 자기 부인이다. 만들어진 것들을 부인함으로 성도는 만들어지지 않으신 분을 만나뵙는다. 만물에 속하지 않으시면서 만물을 충만케 하는 분을 만물 밖에서 만난다. 존재는 수수께끼다. 만물은 비유요, 잠언이다. 이 시험을 통과하는 자, 그가 존재의 비밀(해답)인 그리스도를 만나리라...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벧전 1:20)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골 1:15)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安息)하시니라 (창 2:1-2)

추신> 그렇다고 해서 "세상 밖에서 산다"는 이야기를 다시 금욕주의로 오해해 버리거나, 헬라적 영육이원론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이렇게 오해받지 않기 위해서 성도는 철저히 세상 안에서 산다.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전 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