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08, 2010

이번 ‘검사 스폰서 스캔들’과 보드리야르(보드리야르 관심 없으면 이 글 재미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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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랜드는 ‘실제의’ 나라, ‘실제의’ 미국 전체가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거기 있다.” “워터게이트, 이는 디즈니랜드와 똑같은 시나리오인데, 여기서는 사실들과 고발 사이에는 아무 차이도 없음을 감추는 스캔들 효과가 있다.1)

20일날 피디수첩에서 한 건 큰 걸 터트렸다. 나도 다시보기를 다운받아 봤는데, 입이 딱딱 벌어지더라.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거기에 ‘실제로’ 있었다. 불현듯 잊고 지내던 보드리야르가 떠올랐다. “디즈니랜드는 ‘실제의’ 미국 전체가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거기 있다”라는, 보드리야르의 이토록 쌈빡한 일갈 말이다. 【보드리야르, 그를 처음 접했을 때, ‘이 뭥미?’ 했었는데, 읽다가 푹 빠져버렸다, 마치 무협지를 읽을 때처럼. 유학 와서 그의 별세 소식을 들었는데, 굉장히 아쉬웠다. 조금 더 사시면서 당신이 말한 그 ‘형이상학’을 완성했으면 좋았겠다 싶었다.】

보드리야르를 약간 응용해보자면,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언론 등에서 등장하는 소위 ‘부패한 검찰’의 이미지는 ‘실제의’ 검찰이 부패한 검찰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디즈니랜드는 다른 세상을 사실이라고 믿게 하기 위하여 상상적 세계로 제시된다. 그런데 사실은 그를 감싸고 있는 로스앤젤레스 전체와 미국도 더 이상 실재가 아니고 파생실재와 시뮬라시옹 질서에 속한다. 더 이상 사실성의 거짓 재현 문제(이데올로기)가 아니고, 실재가 더 이상 실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숨기고, 따라서 사실성의 원칙을 구하기 위한 문제이다.2)

참 희한한 것이, 이 책의 이 부분에서 디즈니랜드를, 당대를 떠들썩하게 했던 ‘워터게이트’와 결부시키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워터게이트를 터트린 ‘워싱턴포스트’ 같은 언론의 자본 감시(엠비시의 이번 쾌거도 여기에 속하리라)를 시뮬라시옹 내적인 일로 봐버린다 ― 시뮬라시옹의 ‘저지전략’(28쪽)인 것이다. 예전에는 이게 잘 안 와 닿았는데, 이번 피디수첩 보도를 보며 보드리야르의 진의를 감 잡을 수 있었다.

자본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은 자본을 합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합리성의 이름으로 그에 대항하여 싸워주는 것이다. 또는 도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도덕성의 이름으로 자본과 싸워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건 다른 형태로도 읽힐 수 있다. 이를테면 옛날에는 사람들이 스캔들을 감추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건 스캔들이 아니라는 것을 감추려고 애를 쓴다. 워터게이트는 스캔들이 아니다. 이건 어떤 일이 있어도 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것이 모든 사람들이 감추려고 하는 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추기는 우리가 자본의 원초적인 무대, 즉 자본의 순간적인 잔인성, 이해할 수 없는 잔혹함, 근본적인 부도덕성에 접근함에 따라 우리의 도덕성이 깊어지고 도덕적 공포가 깊어지는 것을 가린다. 자본의 순간적인 잔인성, 그의 이해할 수 없는 잔혹함, 그의 근본적인 부도덕성, 이게 바로 스캔들적인 것이고, 계몽사상 이래로 공산주의에 이르기까지 좌익사상의 공리인 도덕과 경제의 등가 체계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도덕과 경제의 등가라는 계약사상을 자본에 돌린다. 그러나 자본은 이 계약사상에는 전연 관심이 없다. 자본은 괴물 같은 기업이다. 원칙도 없으며, 오직 한 가지, 그게 전부다. 자본에 규칙을 강제하면서 자본을 통제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계몽된> 사상이다. …… 자본 자신은 정작 그가 지배하는 사회와 결코 계약에 의해 맺어져 있지 않다.3)

이러한 보드리야르의 썰을 따르자면, 이번 피디수첩의 쾌거는 ‘근본적으로 부도덕한 자본’이라는 스캔들을 감추기 위한 시뮬라시옹의 저지전략의 하나일 뿐이다 ― 근본적으로 자본은 도덕에 매이지 않고 잔혹하고 잔인하다. 삼성을 보라. 그리고 ‘떡검’을 보라. 우리는 피디수첩의 이번 쾌거를 통해 자본 역시 계몽적 지도를 받을 수 있으리라는 일말의 기대와 상상을 하게 되지만, 이는 사실 자본의 저지전략이자 위장술일 뿐이다. 자본을 욕하는 사람이든 찬양하는 사람이든 모두 자본이 생산하는 시뮬라시옹 안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이 자본은 근본적으로 부도덕하고 잔인하다.

이러한 자본은 “도덕적이고 경제적인 합리성에 따라 고발해야하는 스캔들이 아니다. 자본은 상징적 규칙에 따라 응수해야하는 하나의 도전이다”(46쪽). 자본은 ‘실재’를 야금야금 먹어가면서 교환 법칙을 관철시켜왔다. 더 이상 먹을 실재가 고갈되었기에 자본은 스스로 실재를 만드는데, 이게 바로 ‘파생실재’[hyperreality]다. 이 파생실재는 실재이긴 하나 진짜(?) 실재보다 더 실재인 실재다. 이건 물론 테크놀로지에 의해 가능해졌다. 보드리야르의 매력은, 이러한 파생실재를 단순히 테크놀로지에 연결시키는 데서 그치지 않고, ‘더 실재 같아 보이려는’ 자본의 전략을 읽어낸 것이다. 지시하는 실재가 따로 존재하는 ‘재현’이 아니라, 자기가 지시주체와 지시대상이 동시에 되는 ‘시뮬라시옹’이 바로 자본의 길이라는 것이다.

사실, 보드리야르의 썰을 따라가다 보면 암울하다. 영화 ‘매트릭스’에는 알약이라도 있었지만, 보드리야르는 실컷 분석은 해놓고 뚜렷한 대안은 주지 않는다. 물론, 하나의 가능성은 제시한다. 그게 바로 ‘유혹’이다. 그런데 이건 보드리야르 썰 내부에서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가능성이기에 ‘대안’이라고 말하기가 좀 거시기한 게 사실이다. 그래서 보드리야르는 ‘형이상학자’가 되어야한다. 그래야 자기 썰이 좀 아귀가 맞게 된다. 어쨌든, 내가 보기에는 이 형이상학자께서 당신의 세계를 다 창조하지는 못하시고 유명을 달리하신 듯하다.

자본이 제시하는 파생실재는 ‘쌈빡’하다. 더 진짜 같기에. 그런데 이런 쌈빡함은 ‘코드’[code]에서 비롯한다. ‘실재’의 코드를 실재보다 더 충실하게 따르기에 생겨나는 쌈빡함이 바로 파생실재의 쌈빡함이다. 이러한 쌈빡함이 시뮬라시옹의 궁극적인 힘이다. 유혹은 한 코드를 균열내고 새 코드를 찾게 하는 힘이다. 그러러면 이전 코드의 쌈빡함을 능가하는 쌈빡함이 있어야하는데, 이 쌈빡함을 설득시키는 게 바로 유혹이다. 유혹의 힘 역시 ‘규칙에 대한 정열’로 유지된다. 유혹은 일종의 담론, 본능을 건드리는 담론이다. ㅎㅎㅎ 문제는… 현재 자본을 벗어나도록 할 만큼 쌈빡한 뭔가가 있냐는 거다. 봐라, 유혹을 이야기해봤자 길만 보이지 도착할 마을은 잘 안 보인다.[그러니까 형이상학이다.] 학벌주의를 욕하면서 자기 자식은 어떻게든 좋은 학군에 보내고 돈만 되면 고액과외 시켜려는 것, 떡검을 욕하면서 일이 조금만 안 풀리면 적당히 뇌물 쓰고 인맥 동원하는 것, 집값 갚는다고 허리 휜다고 욕하면서 자기 지역이 뉴타운 되기를 바라는 것 등등. 도덕이니 상식이니 하는 것들보다 자본이 제공하는 쌈빡함들이 더 끌리는 게 지금의 현실 아니겠나. 그러함에도 나는, 보드리야르가 제시하는 전략이 ‘먹고사니즘’, ‘잘사니즘’을 말하며 준열히 꾸짖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그녀를 더 이상 만나지 않거나 아니면 그녀보다 더 쌈빡한 여성을 만나야 그녀를 잊을 수 있다.

뭔가 쌈빡한 담론들이 좀 나왔으면 좋겠다. 피디수첩의 이번 쾌거 같은 일들이 시뮬라시옹이 아니라, 그야말로 상징이 될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1. 장 보드리야르, 하태환 역, ≪시뮬라시옹≫, 40, 43쪽. ↖︎
  2. 40-41쪽. ↖︎
  3. 44-45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