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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교회를 서비스 재화를 제공하는 기관으로 보는 것이다. 물론 영업적 마인드가 근본적인 문제이긴 하지만, 사실은 더 큰 문제는 메가처치의 궁극적인 지향점이 바로 '교회 안에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라는 데에 있다. 이러한 지향점은 교회사적으로 볼 때 교회가 타락할 때 제일 전면에 등장하곤 하던 것이다. 콘스탄티누스의 황제 교회, 중세의 교황 교회 등도 사실 이러한 지향과 무관하지 않다. 이것이 자본주의 안에서 표출될 때 '메가처치'라는 형태로 드러난다는 게 지금의 내 생각이다.
교회 안에서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것은 교회가 세상이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수도원적 우려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며 유산으로 남기고 가신 유일한 것이 바로 교회다(엡 4:7-9).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기 안의 적그리스도적인 요소를 끊임 없이 제거해야한다. 이것은 순수를 향한 강박이나 율법과 권위에 집착하는 것 등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문제다. 그리스도를 드러낸다는 일관성 하에서 행해지는 일인 것이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과 사도들은 결코 '세상'을 좋게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세상의 좋은 부분은 좋게 인정하고 세상의 안 좋은 부분은 안 좋게 보는, 그런 상식적 이야기가 아니다. 세상을 통째로 정죄했다. 바울 사도는 오죽하면 '내가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표현까지 썼다. 이것은 도사연하는 수사적 표현이 아니다. [바울 사도의 절박함을 받아내지 못할 때 바울 사도의 말들은 도사나 학자의 말이 된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선진들이 가진 믿음의 본질을 '세상을 정죄하는 믿음'으로 요약한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히 11:7). 한 마디로 세상에는 건질 게 없다는 것이다. 세상에 건질 게 없으니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한다.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하늘-땅'의 대립은 단순히 초월과 내재의 대립으로 환원될 수 없다.
위와 같은 내용들을 적당한 해석적 기제들을 통해 중화시켜나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욕망을 투입시키지 않고 저 사람들의 소망과 바람들을 그대로 들여다볼 경우, 사실 해석의 여지가 별로 크지 않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드러낸다 함은 출발이 세상을 정죄하는 믿음으로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하는 데에 있다. 이것은 단순히 '내세 지향적 믿음'과 동일시될 수 없다. 세상이 고되거나 힘들어서, 혹은 내세가 세상보다 훨씬 우월해서 내세를 지향하는 것은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하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이교적 신앙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이 '세상'은 단순히 기득권이나 악한 무리로 환원될 수 없다)을 정죄하시고 세상의 정죄를 받아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리고 교회는 바로 이 예수의 영을 받아 그를 구약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로 받고 큰 형님이라 부르며 그분의 아버지를 우리 아버지라 부르는 무리이기에 예수님처럼 세상의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세상을 불의하다, 사망이다 정죄하는 것은 세상에서 선인이나 악인 모두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입장인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단순히 세상을 정죄하는 데에 그 궁극적 목적이 있지 않다. 반복하지만, 교회는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 존재한다. 세상을 정죄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염세주의나 허무주의가 복음은 아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부활생명은 세상을 정죄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세상을 정죄하는 것은 초월적인 율법이나 절대 진리를 들이대어 도출된 결론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에서 드러난 부활생명, 바로 이것을 기준으로 세상을 불의하다, 사망이다 정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세상을 정죄하는 것은 세상이 싫어서, 세상을 혐오해서가 아니다. 교회의 정죄는 부활생명이 나지 않는 세상, 이 생명의 부재를 불의하다, 사망이다, 판단하고 선포하는 것일 뿐이다.
교회의 존속은 육체를 입은 자들이 세상 가운데 있을 때라야 가능하다. 율법 아래 있는 육신을 가진 자들을 통해서만 그리스도는 증거될 수 있다. 세상에서 부활생명은 반드시 육신으로 말미암는 사망을 이기는 것으로만 증거되기에. 이러한 육적 조건은 실상 땅위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이다. 육신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교회에는 교회만의 고유한 본질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영이 다를 뿐이다. 이 영의 다름, 이것으로 교회는 교회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들을 통어하여 그리스도가 드러남, 이것이 정상적인 교회의 모습인 것이다. 이러한 드러남은 세상의 쓸모가 아니라 교회 내부, 즉 형제 사랑으로 귀결된다. 여기서 형제는 '그리스도의 피'로 된 형제이기에, '사해동포(四海同胞)' 식의 해석적 여지를 두지 않는다. 형제와 '외인(外人)'의 구분이 존재하며, 외인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선하게 대해야 하는 대상이다. 이러하기에 세상이 보면 사실 교회는 쓸모 없는 존재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 이 쓸모 없음을 교회는 견뎌내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증거함이 세상의 어떤 것들을 교회의 요소로 받아들임으로써 된다고 말하는 것은 심히 이단적이다. 이러한 받아들임은, 받아들이는 것들을 세상이 (어떤 의미로든) 이미 '좋다'고 승인했음을 전제한다. 세상에서 좋게 여겨지는 것들은 항상 '성경적', '기독교적'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교회로 들어온다. 그리고 교회는 곧 세상스러워진다. 모든 사람에게 만족을 주고 모든 사람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그야말로 땅위의 천당을 지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받아들임이 교회를 분열시키는 요인이 된다. 세상은 다양한 차원에서 '보기 좋다'를 선언한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세상의 기준으로 파당이 생기고 서로를 '반복음적' 내지는 '적그리스도적'이라고 비난하는 다툼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다툼은 재미가 있고 또 율법적 권력을 창출해내기에 한번 생겼다 하면 멈추기가 쉽지 않다.
교회의 길은 인간의 길과 다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모두가 가는 인간의 길이 있다. 그리고 세상은 이 인간의 길을 따라 구성된다. 하나님이 그렇게 돌아가도록 창조해놓으셨다. 교회가 인간의 길로 자리매김할 경우(여기서 내가 말하는 것은 소위 '교회의 세속화'가 아니다), 교회는 교회이기를 포기하게 된다. 모든 인간의 욕망과 바람을 수렴해내고자 할 때, 교회는 바벨론이 된다.
교회의 정죄는 '판단'이지 세상에 대한 복수나 테러가 아니다. 심판과 복수는 오직 하나님의 것이다. 교회는 세상이 인간의 길을 가는 것을 가로막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 길을 앞장 서서 인도하지도 않는다. 세상은 세상의 길을 가도록 교회는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성경과 교회사는 세상의 길을 따르거나, 혹은 제어하려했던 시도가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지를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육신을 가진 인간이자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의 지체다. 이 두 정체성을 섞거나 혼합해서는 안 된다. 거룩의 본질은 순결이다.
인간으로서 인간의 일은 열심히 해야한다. 인간의 길이 혼탁해졌을 때 하나님이 창조해두신 세상의 이치에 호소해야지, 말씀에 호소해서는 안 된다. 물론, 제대로 예수 믿으면 인간의 길 가는 것에도 많은 도움과 보탬을 준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게다가 말씀 역시 땅위에서 기록되었기에 많은 부분 인간의 길과 맞아떨어지는 면이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그러나 부활생명을 받은 자라면 그 경계가 어딘지 안다. 그리고 이러한 경계는 거대 담론으로 한 큐에 정리되는, 무슨 '기독교 윤리'가 아니다.
예수 믿는 것은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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