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글
최근에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라는 사람을 알게 되어 짬짬이 그의 책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서울: 복 있는 사람, 2010)을 읽고 있다. 미국 쪽에서는 굉장히 인정받는 기독교 윤리학자라고 하는데, 그간 이름은 들었어도 별로 관심을 갖지 않다가, 어찌어찌 한국에서 책을 입수할 기회가 있어서 읽게 되었다.
아직 다는 읽지 못했지만, 지금까지 읽은 것만 해도 그의 스탠스를 파악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글을 굉장히 읽히게 쓴다. 번역(김기철)도 깔끔한 것 같다. 하우어워스의 주된 공격 목표는, 그가 일컫는바, ‘콘스탄틴주의’다. 이것은 콘스탄틴 이래로 “교회의 주된 사회적 책임을 국가를 도와주는 버팀목”(54쪽) 정도로 이해하는 태도다. 하우어워스는 콘스탄틴 이래 지금까지 (주류)기독교는 콘스탄틴주의에서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인상적인 것은 그가 리처드 니버의 틀을 비판하며 ‘문화 변혁적인 그리스도’ 카테고리조차 콘스탄틴주의로 분류한다는 것이다.
책 전반에 걸쳐서 하우어워스가 재세례파의 관점, 특별히 요더의 입장을 수용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교회를 일종의 ‘대안적 공동체’로 보는 것이다. 책 제목인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은 하우어워스의 입장을 단적으로 요약해주는 표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나는 그가 콘스탄틴주의에 대해 비판하는 지점들을 대부분 동의한다. 다음의 인용은 그의 입장을 요약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 “콘스탄틴주의에 물든 사고방식은 깨뜨리기가 쉽지 않다. 그런 사고에 젖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독특한 전통에 일치하는지를 기준으로 자신의 윤리적 관점을 판단하지 않고, 기독교 윤리를 카이사르가 얼마나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제시할 수 있는지를 잣대로 자신의 윤리적 견해를 판단한다”(108쪽).
그러함에도 나는 그에게 근본적으로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가 취하고 있는 재세례파-요더의 입장은 “교회의 중보를 통해서‘만’ 세상은 나아질 수 있다”로 요약될 수 있다고 나는 본다. 물론, 교회는 세상을 개선하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고 이쪽에서는 항변할 수 있다. 그러나 하우어워스 자신도 잘 말하고 있듯이, 재세례파는 세상에서 도피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59쪽). 또 그는 교회가 세상 안에 있어야 하느냐, 밖에 있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는 설정이 잘못된 딜레마일 뿐이라고 본다. 교회는 당연히 세상 안에 있다. 그러나 어떤 형태와 목적을 가지고 있느냐가 문제다(61, 62쪽). 그가 자주 쓰는 ‘대안[conunter]’이라는 접두어는 분명 기존의 실체를 전제한다. ‘대안’ 공동체인 교회의 기존 실체는 분명 세상이다. 교회의 중보는 세상에 ‘대안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전개된다(4장). 세상이 대안 이야기 속의 그 세상이 되는 것, 바꿔 말하면, 세상이 (제대로) 세상이 되는 것이 교회가 하는 중보의 목적인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발전되고 개량된 형태이긴 하지만 분명 재세례파의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을 근본적으로 악하게 본다는 것과, 신약, 특별히 산상설교를 규준으로 삼는다는 측면에서 그러하다. 현대 문명의 야만성을 하우어워스는 그것의 악함에 대한 증거로 가져온다. 교회라는, 대안의 식민 공동체 안으로 들어올 때만 평화와 정의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세상이 근본적으로 악하다는 언명은 이른바 ‘원죄론’과는 혼동되어서는 안 되는데, 성경, 특별히 신약성경에서, ‘세상은 악하다’와 ‘세상은 죄 아래 있다’라는 것은 분명 뚜렷하게 구별되는 다른 맥락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 세상 전체는 죄 아래 있긴 하지만 그 자체로 악하지는 않다. 세상은 사람의 관점에서 본다면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다. 그러나 피조계는 근원적인 관점에서는 선한데(창 1:31, 딤전 4:4), 이는 피조계의 위치가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함이기(골 1:15-17)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자연계시'를, 주류 개혁파와는 달리, 기독론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그에게도 콘스탄틴주의자들과 똑같은 헷갈림이 있는데, 이는 ‘교회=개별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라는 정체성과 개별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은 분명 구분되어야 한다(이 글 참조). 성례전은 교회의 일이지,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도덕적으로 해석 · 실천되어서는 안 된다.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동일하게 비추시는 하나님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의 선과 의는 교회를 거치지 않고 직접 세상에 베풀어진다. 그러나 성례를 통해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는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고 교회에만 머문다. 성례는 세상이 선하다, 옳다 하는 것들과 유비적으로 동일시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산상설교는 교회의 모습을 소박하게 설명하고 있지, 세상보다 더 우월한 ‘윤리’를 말하는 게 아니다. 당장 복음을 모르는 사상가, 예를 들면 묵자(墨子)만 하더라도 산상설교를 윤리화시켰을 때 나올 수 있는 내용들을 이미 말하고 있다.
하우어워스는 분명 미국적 상황에서는 큰 의미를 지닌 학자임이 틀림없다. ‘교회의 교회됨’을 강조하는 건 굉장히 긍정적이고 귀담아 들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그의 관점이 과연 제대로 성경을 반영하고 있는지는 별개로 생각해야할 문제다. 게다가, 그에게서 ‘거꾸로 선 콘스탄틴주의’를 본다면 너무 오버한 것일까.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모든 좋은 것들을 교회가 독점하는 건 또 다른 의미의 승리주의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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