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글
H에게 성경 자체의 공동체성
네 글을 읽어보니, 사실 대지(大旨)가 동의가 되었다. 그러함에도 내가 쓰면서도 약간 미심쩍은 부분에 대한 언급이 안 그래도 나왔기에 또 키보드를 든다. 바로 ‘성경만 선교지에 떨어진 경우’에 대한 나의 언급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한 건 공동체가 해석 작업에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한 건, ‘성경 자체의 공동체성’이다.
일단 이 이야기부터 해 보자 ― 문서적(文書的) 실체와 해석하는 실체. 쉽게 구분을 한다면 지금의 논의에서 전자는 성경과 교부고, 후자는 지금, 여기서 성경과 교부를 읽고 있는 공동체다. 이 공동체가 이후의 다른 공동체 내지는 같은 공동체의 성원들에게 의미있는 해석적 유산이 되려면 반드시 ‘기록’을 남겨야 한다. 즉 ‘문서’가 되어야 한다는 거지. 이 지점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다.
너도 17세기 개혁파 신학을 언급했지만, 알다시피 17세기 개혁파 신학은 지금의 근본주의 신학처럼 성경을 ‘센텐치아이’의 하나로 치환하지 않는다. 신론 전에 항상 말씀론을 전개하는데 여기서 반드시 등장하는 내용이 바로 ‘말씀이 기록된 내력’이다. 즉 우리가 흔히 ‘성경’이라고 번역하는 ‘스크립투라’, 즉 기록된 말씀의 내력에 대한 이야기지. 스크립투라는 알다시피 ‘기록된 무엇’에 방점이 찍혀있는 말이다. 우리는 성경, 이렇게 말할 때 ‘성(聖)’에다 방점을 찍지만(그래서 꽤 근본주의적이긴 하지만) 이 사람들은 ‘경(經)’에다 방점을 찍지. 알다시피 ‘상따’는 잘 붙이지지도 않고 등장한다. 이 사람들이 죽 풀어내는 내용이 뭔가 하면 결국 스크립투라 이전에 스크립투라에 들어있는 내용을 전수받은 사람들, 즉 공동체가 있었다는 거다. 이게 구전으로 전해지다가 기록된 거고.
이렇게 본다면 사실 교회라는 공동체를 성경 앞에다 두는 천주교와 구조가 차이가 없어진다. 게다가 기록된 말씀조차 ‘선지자와 사도들의 기록’으로 명명하는데, 사실 이러한 명명은 성경 그 자체에서 거의 그대로 도출된다. 그리고 이러한 명명은 분명 선지자와 사도들이 기록된 말씀보다는 존재론적으로 선재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게다가 구전 말씀을 받은 공동체 역시 ‘교회’라고 보는데, 이건 ‘교회가 성경에 선재한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면 이들 역시 천주교가 주장하는 식으로 교회가 성경에 선재한다는 말을 한 것인가. 그건 아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 천주교가 말하는 내용과 다르다. 하나는, 로마가톨릭교회는 기껏 해봐야 첫 교황까지밖에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는 거다. 천주교가 자기들 기원으로 생각하듯 아브라함, 거슬러 올라가서는 셋 등에 이르는 그 교회는 사실 로마가톨릭교회와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로마가톨릭교회를 비롯하여 지금 ‘교회’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제 교회들은 반드시 성경 뒤에 오고 또 성경을 형성한 공동체의 해석적 영향 아래 있다는 거다. 그러하기에 천주교에서 말하듯 그런 식으로 성경조차 (로마가톨릭교회와 연속성이 있는) 교회가 형성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거지. 두 번째, 기록되든 기록되지 않았든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 모든 공동체 이전에 하나님이 선재하시고 말씀은 하나님의 드러나심(계시)에 대한 기록이라는 거. 이렇게 본다면 근본적으로 말씀은 어떤 공동체보다도 선재한다.
자, 이렇게 본다면 성경이라는 문서는 구전 전달자, 기록된 말씀의 기자인 선지자와 사도들이라는 해석하는 실체가 몽땅 들어있다. 이들은 한때 공동체로서 존재했으나 이제는 문서적 실체로만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들이 그저 ‘텍스트’일 뿐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성경 안에서 모세를 만나고 다윗을 만나고 바울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나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만난다. 이 모든 분들이 여전히 성경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성경 그 자체가 이미 ‘공동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는 근대 해석학의 근간을 뒤트는 언명일 수는 있으나,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성경을 통해 하고자 하는 욕망을 일단 자제하고 보면, 성경이 말을 하고 있고, 그것도 공동체적으로 말을 하고 있다는 건 자명하다.
내가 예를 든 비선교지 성경 이야기는, 물론 비현실적인 판타지긴 하지만, 이러한 성경의 공동체성을 부각한 것이다. 성경 자체에 많은 교육적 목소리들이 있고 이런 목소리들이 충분히 정통신앙을 산출해낼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다른 어떤 권위나 도움이 필요 없이 자체적으로. 그들 가운데 우리로 치면 ‘교부들’의 지위에 설 만한 사람들을 성경 스스로가 양산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성령의 조명이 필요하지만.
그러므로 그렇게 불러도 좋다면, 성경 자체가 ‘원(原)공동체’다. 어차피 우리도 생물학적 힘이 소진하면 문서로나 남게 될 것이다. 여튼, 난 교회일치와 연합은 이 원공동체와 연합함으로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니까 차라리 전통, 교부, 이런 것을 제하여 버리고 오직 성경만 갖고 이야기하는 게 ‘원리적으로는’ 교회일치의 첩경이라 본다. ‘오직 나의 성경’, ‘오직 우리 교단의 성경’의 상황을 산출해내는 건, 그런 개인, 교단에 ‘교부’나 ‘전통’ 같은 것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안 해 봤냐. 네가 ‘편향’되다고 평가하는 UBF도 자기들로는 공명정대하게 성경해석하고 있을 거다.^^ 그리고 천주교 쪽에서 보면 우린 엄청 편향되어있고. 그러니까 자기에게 있는 드라빔들을 깡그리 없애고 성경 하나 놓고 다이다이하자는 거지.^^ 물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건 안다. 어차피 다들 자기가 부여잡고 있는 교부나 전통 같은 것들을 안 놓을 것이기에.
물론, 교부나 전통은 천주교 개신교를 비롯한 공통 유산이기에 저런 식의 편향성과는 다르다고 말할 수도 있다. 스타인메츠 교수가 ‘카톨릭성’을 교부나 전통을 가지고 정의하는 것도 이런 맥락일 것이고. 그러함에도 성경을 권위로 삼는 숱한 갑남을녀 중 교부나 전통을 권위로 삼을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들, 교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 이들은 그럼 찍어내고 교부, 전통 좋아하는 사람들하고만 일치를 이룰 것인가? (아, 이것도 수사적 표현이다. 네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나도 교부들의 썰들을 잘 이용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함에도 교부의 권위는 성경 권위의 부분집합이라고 생각한다. 별도의 교부권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난 아직도 포기할 수 없다. 그들이 사도들과 근접한 것은 사실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다. 알다시피 그들 역시 우리가 읽은 모세의 글들, 바울의 글들과 베드로의 글들, 요한의 글들을 읽고 썰을 푼 게 대다수다. 즉 성경을 읽고 썰을 푼 게 대부분이다. 교부들이 일치하여 낸 결론들은 물론 하나의 결정적인 참조점은 될 수 있으나, 그들이 없다고 성경에서 그런 결론들을 못 도출해내는 건 또 아니다. 그들도 어차피 성경을 통해 그런 결론들을 이끌어낸 게 아니냐. 문화적인 근접성은 물론 있을 수 있으나 문화적 근접성은 결정적인 요소는 되지 못한다. 예수님과 동질의 문화에 있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 대적하지 않았냐. 게다가 교부들 중 우리처럼 신구약을, 그것도 인쇄상태 이렇게 좋은 책으로 갖추고 있었던 사람들이 몇이나 되었겠냐?^^ 이런 좋은 물질적 학적 기반은 문화적 근접성을 압도하지 않을까.^^ 어쨌든, 사도에 근접해서 더 순수하다는 말은, 설령 그 신학자들이 했다 하더라도 난 동의할 수 없다.
해석학적 순환에 대한 네 이야기는 한편으로는 동의하나 한편으로는 좀 덧붙이고 싶다. 일단 실천적으로는 모든 해석적 공동체, 예를 들면 개혁파 등이 해석적 무한 순환을 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의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서 멈춘다. 요새는 이런 말하면 몰매 맞는 분위기지만^^ 어쨌든 원리적으로 해석적 순환은 내가 말한 원공동체에서 멈춘다. 원공동체에 진리가 있다는 거지. 물론, 원공동체 자체가 해석의 대상이고 또 이 공동체를 해석한 활동이 전통을 이루어 복수의 해석 공동체들을 형성하긴 했지만서도. 그래서 난 궁극적으로 해석적 순환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끝날 것이라는, 종말론적 기대^^를 가지고 있다. 그 전까지는 자기가 속한 해석 공동체가 최종적인 이야기를 했다고 믿고 서로 박터지게 논쟁하는 수밖에... 그래서 스스로가 기반하는 해석 방법론 내지는 틀을 항상 의식화시켜 놓는 게 필요하다. 이게 선명하지 않게 되면 방법 자체가 이데올로기가 되기 십상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