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글
권위에 대하여
사실 내가 말하던 내용은 권위의 문제와는 조금 다른 내용이었는데, 네가 권위의 문제로 해석을 하니까 다시 권위의 문제로 이야기를 해보자.
네가 말하는 ‘권위’가 서양말 ‘권위[authority]’의 맥락에 있는 거라면, 알다시피 이 말은 ‘지어낸 자 내지는 창시자[auctor]의 권세’를 뜻한다. 어떤 것을 처음으로 지어낸 자, 혹은 산출해낸 자에게 권세를 부여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자기가 산출해낸 것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기에. 그는 적어도 자기가 산출해낸 것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보다도 상석(上席)에 앉게 된다.
그렇다면 어떤 권위를 주장하려면 창시자이거나 적어도 창시자에 버금가는 지식과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권능’이 없다면 그의 ‘권세’는 즉시 폐지되어야 한다. 우리가 어떤 권위를 따르는 것도 그의 권능에 대한 판단이 있기 때문이고 어떤 권위의 권능은 항상 검증되어야 한다.
위의 내용을 토대로 볼 때, 성경은 그 자체로 권위가 될 수 없다. 불교를 믿는 사회나 완전 무종교적 사회에서는 성경이 권위를 가질 수 없다. 권위는 항상 매개적이다. '아욱토르'조차 자기 산출물을 근거로 상석에 앉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님 승천하시고 성령 강림하신 뒤 선지자와 사도가 생물학적으로 우리와 함께 하지 않기에 더 이상 성경에 대한 근본적인 권위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성경의 원 권위자인 성령은 ‘나타나는’ 분이 아니시다. 성령을 받은 사람이나 안 받은 사람이나 물질적 내지는 생물학적 구분이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성화에 보면 자꾸 사람들 머리에 아우라를 씌운다.ㅋㅋㅋ 아니면 자꾸 상석을 물리적으로 만들거나.ㅎㅎㅎ]
그러니까, 다시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다 드러나기 전까진 성경과 관련된 권위는 모두 유보적이라는 거다. 성경을 최종권위로 삼아 ‘엑스 카테드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거지. 우리는 서로 교제하면서 서로 성경을 읽으면서 가장 합당하다고 생각되는 케뤼그마를 서로 나누고 붙잡을 뿐이다. 물론 숱한 판단을 받고 같은 교제권에서 이제는 다 수납하는 것들, 우리로 따지면 고백서들을, 그 교제권은 성경을 가장 잘 해설한 것으로 받아들이긴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다른 교제권과 적극적으로 논쟁도 한다. 그러나 이게 곧 고백서들이 무오한 진리라는 걸 말하는 건 아니다. 물론, 나나 너야 역사적 개혁주의가 성경을 가장 잘 이해했다고 믿고 확신하지만, 이 확신이 곧 역사적 개혁주의의 무류성을 담보해주지는 않는다. [물론, 네가 이와 달리 생각한다는 건 아니고.^^]
네가 말한 권위의 종류들은 나도 모두 수납한다. 그러함에도 그 모든 권위들은 유보적이라는 것. 언제든지 프로테스트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 성경은 그들이 지어낸 것이 아니기에.
나머지 내용들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세 권위는 실체적인 것들이 아니라 ‘양태적’인 것들이라는 견해를 밝히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내 ‘원공동체론’은 내가 이전에 댓글에서 설명한 ‘성도의 교제’를 좀 더 풀어 설명하고 거기에 이름을 붙인 거다. 네 윗 답글 이전에 이미 나왔던 내용이다.
첫째, 나도 네가 지적하는 ‘공동체와 그 기록의 구분’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래서 내가 나름대로 재정의를 한 것이고. 내가 말하는 공동체는, 그 안에 문서를 포함하는 주체고 더 나아가서 문서화되어가는 주체다. 텍스트와 콘텍스트가 칼로 무 베듯 딱 떨어지는 주체가 아니라는 거. 내가 성경을 공동체라고 본 건, 단순히 그 안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들의 집합을 의미한 게 아니라, 성경의 기자인 선지자와 사도 공동체 혹은 선지자-사도적 공동체를 의미한 거다.
‘매개’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보면, 개혁파 성경론의 테제 중 하나가 ‘성경 기록자는 매개 없이 성령과 접촉했고 그 이후 사람들은 매개를 통해 접촉한다’이다. 전자가 알다시피 ‘영감론’이고 후자는 ‘성령-말씀 연합론 내지는 일치론’이다. 그러니까 매개 없이 성령과 접촉한 선지자와 사도들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접촉한다. 개혁파의 테제에 근거한다면 매개는 순수한 매개일 수만은 없다는 거. ‘다리(橋)’보다는 오히려 ‘마당(場)’의 의미에 더 가깝다는 거. 선지자와 사도들이 이야기하는 마당을 벗어나서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과 접촉할 길이 없다는 거. 이 마당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이 마당에 우리도 참여해야 하고. [이건 사실 ‘메시테스’이자 ‘텔로스’인 그리스도의 지위와 유사한 면도 없잖아 있다. 난 요한복음 1장에 등장하는 '말씀'을 이런 맥락에서 본다. 어쨌든]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해 하나님과 접촉한다는 의미에서 분명 ‘간접적’이긴 하지만, 어쨌든 하나님과 접촉하는 것이다. 성경, 즉 선지자와 사도를 만나는 것 자체가 벌써 하나님과 접촉하는 것이다. 이 와중에 만나는 선지자와 사도는 문서이기도 하고 인격이기도 하다.
둘째, ‘현재의 해석 공동체’를 말한다면 나도 너와 동일한 답변을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맥락의 답변은 이미 내가 충분히 한 것 같은데 말야... 그런데 분명, 내가 제기하고자 한 문제는 단지 ‘현재 해석 공동체의 정황을 근거로 한 해석활동’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성경의 근본적인 자족성’이었다. 현재의 해석 공동체는 이미 자기 안에 많은 문서들을 갖고 있기에 내가 말한 방식으로서의 ‘성경만’은 불가능하다. 이건 내가 충분히 답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말야. 그렇기에 내가 비선교지 운운한 예를 든 것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현재든 어떻든, 성경 자체만으로도 정통신앙, 즉 현재만큼의 정통신앙을 산출할 가능성은 존재한다는 거다. 이건 어떻게 보면 계보적으로 정리될 수 있는 문제다.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건, 교부가 아니라 우(又) 교부라도 선지자와 사도들의 공동체를 선재해서 존재할 수 없다는 거. 이 원공동체가 그 이후 모든 것의 아르케가 된다는 것.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이었다. 성경을 해석한 후 결과물의 스펙트럼은 그렇게 넓지 않다. 그 스펙트럼 중 한 부분이 바로 정통신앙이고. 정통신앙이 존재하는 현 상황 자체가 내 말에 대한 하나의 증거가 된다.
각론에 대한 너의 반론들을 답해보면,
첫째 반론은 바로 위 단락의 내용으로 충분히 답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둘째 반론은 교부와 전통은 교회일치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교부와 전통은 그야말로 결정적인 참고사항 내지는 참조점이지, 일치는 기본적으로 성경을 가지고 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서로 의견이 다르면 그냥 그대로 두자.
셋째 반론은 ‘성경조차 공동체’라고 한 나의 언명을 재언급하는 걸로 일단락하자. 그 이후의 공동체적 권위는 선지자와 사도들의 공동체에서 산출된 거고. 그러하기에 그들의 권위조차 선지자와 사도들 공동체의 권위일 뿐이라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