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03, 2011

≪고백록≫, 제 10권에 대한 단상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제 안, 제 기억이라는 큰 방에서 저는 이 일들을 하고 있나이다. 그 방 안, 바로 거기에 하늘과 땅과 바다가 저를 대하여 있사온대, 제가 지각한 모든 것과 더불어 거기 있사옵고 제게서 잊혀진 것은 거기 없사옵나이다. 그 방 안, 바로 거기에서 저, 바로 저 자신과 마주치고, 언제 어디서 제가 했던 일, 그걸 하면서 이래저래 겪은 것을 그 방 안, 바로 거기에서 다시 일구어 내나이다.1)

Intus haec ago, in aula ingenti memoriae meae. Ibi enim mihi coelum et terra et mare praesto sunt, cum omnibus quae in eis sentire potui, praeter illa quae oblitus sum. Ibi et ipse mihi occurro, meque recolo, quid, quando, et ubi egerim, quoque modo cum agerem affectus fuerim.

아침에 일어나서 노트북을 켜면 내 노트북은, 다른 모든 노트북들이 그러하듯, 자동으로 인터넷에 접속이 된다. 모니터가 밝아지면 오른쪽으로 십 도쯤 자동적으로 기우는 내 척추, 왼손은 턱으로, 오른손은 죽 뻗어서 마우스로. ‘딸깍딸깍’ 검지가 왼쪽 버튼을 누르면 내 앞에는 어느 새 수십, 수백, 그리고 수만 킬로 떨어져있는 친구들이 주절대는 흔적들이 떠오른다. 마치 바로 옆에 앉아서 수다를 떨 듯. 세상은 돌고 도는 걸까. 억겁의 케이블을 빛의 속도로 돌고 돌아, 그렇게 그들은 내 앞에 와있다.

싸이월드를 넘어 페북에까지 내 자리를 하나 마련한 요즘, 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그 중에서도 제 10권의 내용을 곱씹게 된다. 세상은 돌고 도는 걸까. 1600여 년이라는 세월을 돌고 돌아, 그렇게 그는 내 앞에 와있다.

그에게 있어서 기억은 큰 중요성을 갖는다. 밥을 입으로 먹으면 몸을 이롭게 하고 뒤로 나간다. 공기를 입으로 들이쉬면 몸에 생기를 주고 다시 입으로 나간다. 그러나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취하는 모든 것은, 잊혀지는 것 빼고는 내 안에 쌓인다. ‘나’라는 존재가 내 몸을 경계로 확정되는 그 무엇이라면, ‘나’는 기억을 통해서야 비로소 ‘나 밖’의 것들과 진실로 소통할 수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은, 주객(主客) 이원론이 일상화된 지금,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듯하다. 물론, 그에게도 ‘나’를 중심으로 ‘내 안’, 그리고 ‘내 밖’이라는 구분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에게 내 밖의 공간이나 내 안의 공간은 모두 ‘객관적인’ 진실성을 갖는다. 이러한 그의 입장을 쉽게 ‘신비주의적’이라고 명명할 수 있긴 하지만, ‘신비주의’라는 말은 그의 사상을 담아내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 그에게 ‘내 안’은, ‘신비’가 아니라 내 밖과 동일한 현실이므로.

실상 ≪고백록≫ 자체가 아우구스티누스의 기억의 방들에서 꺼내온 것들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유년 시절부터 썰을 푸는 건,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는 용법대로의 그 기억하기가 아니라, 그가 쓰는 방식대로의 기억을 풀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억의 풀어냄이 지금 그가 겪고 있는 나 밖의 현실보다 열등하거나 혹은 우월한 그 무엇은 아니다. 기억 안의 ‘나’는 지금의 나와 다른 무엇이 아닌 것이다.

더 나아가서, 기억에 들어온 적이 없는 사람은 누구도 ‘나’에 대해 ‘너’로 설 수 없게 된다. 기억이라는 방 안에 ‘너’의 향기와, 목소리와, 눈매를 남긴 너라야 내게 너일 수 있는 것이다. 인격체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이 나의 기억에 한 번 들어와야 내가 이름 부를 수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된다. 지각의 다발들을 ‘너’로 아는 것은 내 기억 속에서 너를 하나로 간직하기 때문이다. 너를 어떤 ‘하나’로 잡아내지 못할 때, 너는 내게서 잊혀진다.

모니터 너머의 세상은 다름 아닌 내 기억의 확장이다. 맥루한이 갈파한 바 그 ‘medium’, 즉 ‘매체(媒體)’다. 나의 흔적이 거기 남아있고 너의 흔적이 거기 남아있다. 나의 말들이 거기 남아있고 너의 말들이 거기 남아있다. 종이노트가, 그리고 컴퓨터의 기능 중 큰 부분이 정보기억이라는 아주 작은 부분에 있어서 ‘기억’의 확장이었다면, 사이버 공간은 기억의 대부분을 포괄하는 확장이다. 내 기억은 이제, 모니터를 넘어 광대하게 펼쳐진다.

혹자는 그렇게 말한다. 사이버 세상이 인격적인 소통을 방해한다고. 그러나 나는 묻는다. 실물 세상에는 서로 간 위선이 존재하지 않냐고. 그는 묻는다. 서로 그 위선을 넘어서 그 사람을 진실로 만나게 되는 노력이 없이 어떻게 진정한 사귐이 있을 수 있냐고. 그러나 나는 묻는다. 사이버 세상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냐고. 조금만 생각을 달리 하면, 다른 건 몰라도 ‘기억의 확장’으로서의 매체는 소통에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방해는 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없어진 건 그리움이요, 기다림이다. 그리움과 기다림은 ‘시간차’에서 발생한다. ‘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워주던’ 그때 그 시절, 우리는 몇 달씩 걸려 외국에 있는 사람과 소통했다. 그러나 쓰고 발송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채 10초도 안 되는 이메일을 통해 우리는 나성에서 편지 받아보던 그리움과 기다림을 소멸시켰다.

아날로그는 반드시 그리움과 기다림을 수반한다. 문명은 항상 아날로그를 줄이는 쪽으로 발달해왔다. 테크놀로지가 제아무리 발달해도 잉여는 존재한다. 그렇기에 그리움과 기다림은 없어질 수 없다. 그런 일은 없겠지만, 테크놀로지가 잉여 없이 딱 떨어져서 인간 전체를 포괄하게 된다면 아마 영화 ‘메트릭스’ 같은 세상이 도래하리라. 그러나 이렇게 될 가능성은, 내 생각에는, 없다.

기차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 낭만적인 사람들은 기차 이전의 아날로그 세상을 그리워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기차 이후의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아날로그가 사라졌는지. 여전히 그리움과 기다림은 존재한다. 이제 칙칙폭폭 기차조차 아날로그의 낭만이 되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아날로그로서의 잉여는 충분히 존재한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항상, 우리가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님을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아날로그의 그리움과 기다림으로 요약될 수 있는 ‘인간적인 것들’의 사라짐을 근거로 테크놀로지를 비판하는 것은, 그래서 사이버 공간을 비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차라리, 근본적으로 문명 자체를 비판한다면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인간과 문명은 과연 한시라도 분리된 적이 있었던가. 돌도끼를 사용하고 부싯돌을 사용하던 그 순간부터 우리의 아날로그들은 조금씩 소멸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함에도 ‘님’들은 소멸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소통에 있어서 요체는 테크놀로지가 아니다. 내가 소통하기를 원하는 대상, ‘기룬 님’이 있느냐이다. 테크놀로지가 소멸시킨 아날로그로 인해 그리움과 기다림의 절대량은 줄었을 수 있다. 예전에는 사실은 다섯만큼만 님을 그리워했는데, 다가오는 그리움의 무게는 열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섯만큼 님을 그리워하면, 다가오는 그리움의 무게는 여섯 내지는 일곱밖에 되지 않는다. 차라리 소통 그 자체에 충실해질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이제, 내가 얼마나 님을 그리워하느냐가 소통 자체를 좌우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둘만큼만 님을 그리워했어도 떨어져 있고 오래 만나지 못하면 그 그리움이 열로 증폭되기도 했었다. 그래서 내 그리움이 열인 줄 알고 그에게 다가가다 지치고 상처받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순수하게 내가 님을 얼마나 그리고 있느냐에 따라 소통이 유지된다. 열 가졌으면 열만큼, 둘 가졌으면 둘만큼.

나의 기억 속에서 ‘하나’로 알게 된 너. 내게 대하여 순수하게 '잉여'인 너. 이 ‘너’가 ‘님’이 되어감, 그리고 너의 기억 속에서 내가 님이 되어감. ‘기룬 님’에 기름기가 쫙 빠지고 순수하게 ‘님 그 자체’만 그리워하게 됨. 이런 것들이 소통의 요체 아닐까.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 당신을 사랑했습나이다.
내 안에 님이 계시거늘 나는 밖에서, 나는 밖에서 님을 찾아 당신의 아리따운 피조물 속으로 더러운 몸을 쑤셔 넣었사오니! 님은 나와 같이 계시건만 나는 님과 같이 아니 있었나이다.2)

그러함에도... '육체'로서의 님과 조우하는 것은 생략될 수 없다. 모든 님이 다 하나님은 아니기에... 너에게서 근원적으로 순수한 잉여는 너의 육체뿐이기에...

들고 읽어라

아우구스티누스(이하 ‘Aug’로 표기)는 기억을, 신비주의적으로 혹은 내적 초월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대하지는 않는다. 분명한 것은, Aug가 계시실증주의자가 아닌 것과 동일하게, 신비주의자 내지는 (내면적) 존재론적 신학자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내 안’과 ‘내 밖’은 존재론적으로 등가(等價)다. 오차의 범위는 무의미하다. 존재에 있어서 측정기준점은 ‘여기’가 아니라 ‘거기’, 즉 무한[∞]이신 하나님이므로. 더불어, 내 안이든 내 밖이든 하나님과 공유(共有)하는 것은 없다.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신다’는 것과 ‘인간이 그분의 존재를 실제로 겪는다’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그는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그 부분[동물도 할 줄 아는 기억의 부분]을 뛰어넘어서 내 마음의 감정을 간직해 놓은 곳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도 나는 당신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기억 안에 있는 바로 내 마음(영혼)의 자리에까지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는 마음이 그 자신을 기억(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도 당신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어떤 물체의 영상도 아니요, 살아있는 사람들의 감정—우리가 즐거울 때나 슬플 때, 무엇을 원하거나 두려워할 때, 무엇을 기억하거나 망각할 때, 혹은 그와 같은 것을 느낄 때의 감정 등—도 아닙니다. 또한 당신은 마음 자체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 마음의 주님이 되시고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다 변합니다만, 이 모든 것들을 초월하여 계시는 당신은 불변하십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내가 당신을 알게 된 때부터 내 기억 안에 거하시기로 택하시었습니다. 그러면 내가 왜 당신이 기억 안의 어떤 특정한 장소에 계신 것처럼 당신이 거하시는 곳을 찾고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내가 처음으로 당신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당신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내가 당신을 생각하게 될 때 내 기억 안에서 당신을 찾아 뵙기 때문입니다.3)

그러면 내가 당신을 알기 위해서는 어디서 당신을 찾아뵈어야 합니까? 내가 당신을 알게 되기 이전에는 당신은 내 기억 안에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내가 당신을 어디에서 찾아 만나 당신을 알 수 있게 되겠습니까? 내 위에 계시는 당신 안에서만 당신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계시는 장소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갔다, 뒤로 물러갔다 하지만 그것은 장소를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4)

우리가 분명 위 인용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Aug에게는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가 있었고 ‘하나님이 그의 기억 안에 계시지 않은 때’가 있었다. 그렇다면 아래의 내용에 나오는 ‘내 안에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은 분명 ‘하나님을 찾으려면 내면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될 수 없다. 내 안으로 아무리 들어가봐야, 만일 내가 하나님을 ‘알기 이전’이라면, 그리고 하나님이 ‘내 기억 안에 계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 당신을 사랑했습나이다. 내 안에 님이 계시거늘 나는 밖에서, 나는 밖에서 님을
찾아 당신의 아리따운 피조물 속으로 더러운 몸을 쑤셔 넣었사오니!
님은 나와 같이 계시건만 나는 님과 같이 아니 있었나이다.5)

이러한 언명들이 혹시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부인하는 것으로 비췰까봐 Aug는 위 인용에서 ‘당신이 계시는 장소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딱 못을 박아놓았다. 엄밀히 말하면, ‘기억’을 공간으로 이해할 때, 하나님이 기억 속에 계시지 않는다는 건, 그래서 하나님을 알고 있지 못하다는 건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에 위배된다. 이런 딜레마 같이 보이는 상황을 나름 정리해주는 게 바로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소리’의 차원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진리이신 당신은 어디에서든지 계시어 당신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시며, 모든 사람들의 여러 가지 요구를 동시적으로 들어주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확실한 대답을 확실히 듣지를 못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소원을 당신께 간구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항상 자기들이 소원한 대로 당신의 응답을 듣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의 충실한 종은 자기가 뜻하는 것을 당신이 들어주기 원하기보다는 오히려 당신께서 말씀하신 뜻을 들으려 원하는 것입니다.6)

소리는, 그것이 발해진 공간에는 빈틈없이 울려 퍼진다. 그 공간을 꽉 채우는 것이다. 그러나 소리는, 듣는 귀가 없다면, 즉 위 인용에도 나오듯이 ‘듣지 못한다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하나님은 ‘말씀’으로서 만유에 울리고 계시지만, 그래서 무소부재하시지만, 하나님을 듣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억에 하나님이 ‘없는’ 것은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귀가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위 제 10권, 27, 38 에서는 ‘피조물의 아름다움’(위 인용)과 ‘귀머거리가 된 내 귀’가 대조되고 있다. 피조물의 아름다움(시각)에 홀려 실족한 Aug는 하나님이 ‘귀를 열어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는 제일 먼저 ‘부르시는 하나님’이 등장하고 난 뒤, 하나님의 빛, 향기, 맛, 하나님을 향한 굶주림, 갈증, 그리움 등이 뒤이어서 등장하는 것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우선 ‘부르심’이 먼저인 것이다. 이렇게 귀가 생겨서 알게 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Aug는 모순형용을 써서 ‘오래되고 새로운 아름다움[pulchritude tam antique et tam nova]’라고 명명하고 있다.

이렇게 Aug에게 있어서 진리는 우선 소리, 즉 ‘말씀’이다. 제 10권 말미에 가면 중보자 이야기를 하며 참 중보자와 거짓 중보자를 판결한 뒤 끝을 맺는다. 그리고 제 11권은 온전히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천지창조에 대한 주해를 한다.

이로써 분명해지는 것은 사람의 내면에는 하나님이 계실 수도, 안 계실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근거로,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존재 자체 내지는 가장 깊은, 혹은 높은 존재라는 것을 근거로 인간 내면 가운데 하나님이 계실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은 Aug의 본의(本意)에 어긋난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하나님 알기 ‘시작’하게 하였는가? 바로 ‘기록된 말씀’이다. 이것은 ≪고백록≫ 자체가 너무나도 분명히 서술하고 있다. 제 8권 12장에 보면 Aug의 회심하는 순간이 묘사되어있는데, 그는 ‘내면의’ 소리 내지는 내면의 인도 혹은 끌림 혹은 영감 등에 의해 회심한 게 아니다. 그를 회심으로 인도한 것은 그의 ‘밖’에서 들리는 아이들의 노랫소리였다 — “들고 읽어라, 들고 읽어라[tolle lege, tolle lege]!” 그리고 그는 역시 그의 ‘밖’에 있는 기록된 말씀인 로마서 13장 13-14절을 읽었다. 이 말씀을 읽었을 때 ‘즉시 확실성의 빛이 그의 마음에 흘러 들어가[luce securitatis infusa cordi meo]’ 모든 의심의 밤들을 몰아내었다. 여기서 ‘infusa cordi meo’를 ‘외적 소명’에 상응하는 ‘성령의 내적 역사’라고 읽어내는 것은 좀 도식적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단순히 말씀이 ‘밖에서 안으로’ 뚫고 들어간 것을 묘사하는 것이다.

또한, 위 인용에 나오는 ‘내 안에 하나님이 계셨다’는 내용 역시 Aug가 회심하기 훨씬 전부터 성경 내용들을 접했고, 따라서 그의 안에 이 기억된 말씀들을 매개로 하나님이 계셨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안에 계시긴 했지만, 그는 하나님을 듣지 못했고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Aug를, 그가 사용하는 어법(語法)인 (신)플라톤주의 쪽으로 과도하게 해석하는 것은 조심해야할 필요가 있다. 그가 분명 (신)플라톤주의를 자기 어법으로 사용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진리를 ‘소리-말씀’으로 연결시키는 흐름과, 말씀을 들어 회심하게 된 이전과 이후를 분명하게 선을 그어 딱 구별하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고백록≫ 자체가 회심 이전과 이후를 전제하지 않고는 아무 의미가 없고, 또 회심은 ‘기록된 말씀’을 전제하지 않고는 아무 의미가 없다.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에 대한 신플라톤스런 썰들 역시 그에게 있어서의 기록된 말씀의 위치와 중요성을 간과한 채 받아들여진다면, Aug를 왜곡하게 될 것이다.


  1.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제 10권, 8, 14. ↖︎
  2. 최민순 역, 제 10권, 27, 38. ↖︎
  3. 선한용 역, 제 10권, 25, 36. ↖︎
  4. 선한용 역, 제 10권, 26, 37. ↖︎
  5. 최민순 역, 제 10권, 27, 38. ↖︎
  6. 선한용 역, 제 10권, 26, 3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