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읽고 밤잠을 설쳤던 이야기 중 단연 으뜸은 바로 이 <여우누이>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해님과 달님>과 비슷한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가장 사랑하던 가족이 사실은 괴물이었다’이다 — 사랑하는 엄마인줄 알았는데 나를 잡아먹으려는 호랑이다, 사랑하는 여동생인줄 알았는데 나를 잡아먹으려는 여우다. 이 모티프는 상당히 효과가 있어서, 지금도 공포물에 단골로 등장한다. 좀비물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다. 진화된 좀비물인 에일리언류도 그렇고.
문제는, <해님과 달님>이 당시 백성 대다수를 압제하던 당대의 체제를 비판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면, <여우누이>는 상당히 체제 수호적인 이야기로 볼 수 있다는 거다. 집안부터가 완전히 다르다.
<해님과 달님>은 홀어머니가 겨우 부양하는 가정이 배경이 된다. 동네 안에 집을 구하지 못해 심심산중에 외따로이 살고 있는 가족. 이 집안조차 삼켜버리는 호랑이. 그야말로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라는 고사가 절로 생각나는 설정이다. 결국 ‘초월적’ 해결 말고는 어떤 해결도 기대할 수 없는 현실의 신산함, 땅을 뜨지 않고서는 끝나지 않는 압제, <해님과 달님>에서는 이걸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여우누이>는 일단 부자집이 배경이다. 줄거리를 관통하는 물음을 끄집어내보면, ‘왜 아들이 셋이나 되는 부자집이 망하게 되었는가’ 정도라 할 수 있다. 그에 대한 답은 ‘딸만 좋아하고 아들 같은 건 없어져도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이 문구는 작품에 직접 나온다). ‘해님과 달님’에서는 엄마에서 호랑이로의 변태[metamorphosis]는 섞일 수 없는 경계 설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 ‘엄마의 죽음 / 호랑이가 엄마를 먹음’이라는 경계. 이 뚜렷한 단절은 <해님과 달님> 플롯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들 중 하나다.
그러나 <여우누이>에서는 변태는 은폐되어있다. ‘알고보니 여우였더라!’인 것이다. 여기서 <해님과 달님>에서는 결코 허락될 수 없는 가능성이 허락된다 — ‘누이가 여우였나, 여우가 누이였나.’ <해님과 달님>에서는 엄마는 엄마, 호랑이는 호랑이다. 호랑이는 엄마를 잡아먹고 엄마가 되고, 엄마는 호랑이에게 잡아먹혔기에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엄마는 호랑이였을 수 없고 호랑이는 엄마였을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지금은 호랑이가 엄마라도. 그러함에도, 지금에서조차 엄마가 호랑이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우누이>에서는 여우는 누이였고 누이는 여우였다. 또, 여우는 누이고 누이는 여우다. 분명 누이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통해 나왔다. 그렇다면 이 누이의 변태의 순간은 언제였을까? 없다. 여우는 누이였고 누이는 여우였다. 또, 여우는 누이고 누이는 여우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인간의 본질을 초월해서 진짜 여우를 딸로 받았던 것이다. 이것은 세 아들 다음의 이 고명딸이 유난히 ‘매력적’이었다는 데서 증명이 된다. 【이 이야기는 ‘여시(여우) 같다’라는, 우리나라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숙어를 전제하고 전개된다 할 수 있으리라.】 이렇게 보면, 그들이 여우를 딸로 받은 것은, 무뚝뚝하고 매력없는 아들 말고 예쁘고 매력적인 딸을 바란 그 소망 때문이다. 서낭당에 간절히 빌 정도로 딸을 원했던 그들의 그 소망이 응답되어 여우를 딸로 받은 것이다. 딸을 바라는 이 소망, 이게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우선은 이렇게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여우였던 딸은 자신의 매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체를 은폐한다. ‘여시 같은 딸래미’를 원했던 그들은 여시의 매력 때문에 눈이 어두어진다. 그리고 이 여우는 온 집안을 (실제 물리적으로) 먹어버린다. 이 이야기에서 변태는 바로 여기서 이루어진다. 누이가 여우고 여우가 누이였음은 단절 없이 드러난다. 여시 같은 딸래미를 소망했던 대가는 집안이 결딴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억해야할 것은, ‘여우’에는 ‘매력적임’과 ‘사람과 짐승을 먹어버림’이라는 양면성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여우의 표면은 매력적인 딸래미이고 저 깊은 곳은 사람과 짐승의 간을 빼먹는 괴물이다. 단순히 ‘양의 탈을 쓴 이리’라는 의미가 아니다. 여우에게는 양의 탈을 쓴 이리에게서처럼 양과 이리 같은 단절이 없다. 양가죽이 제아무리 이리의 몸에 딱맞아도 양가죽과 이리 사이에는 ‘틈’이 없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여우는 매력적인 딸래미인 ‘동시에’ 간을 빼먹는 괴물인 것이다. 양가죽을 보태듯 보탤 필요가 없는 존재, 이게 바로 여우누이다.
유교적 가부장 체제 하에서 가통(家統)은 아들을 통해 전수된다. 한 집안은 아버지의 이름을 근거로 아들을 통해 이어진다. 이어짐, 이것은 반드시 ‘보태는’ 것이다. 즉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생산(生産)을 통해 가능하다. 그러하기에 근친결혼은 철저하게 금지되는데, 이는 근친결혼은 생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자가 아들을 둘 수 있는 것은 아내라는 전적 타자를 통해서 가능하다. 남자는 결코 자기 누이나 어미를 통해 아들을 둘 수 없다. 이것은 보태는 게 아니요, 그러하기에 생산이 아니다. 누이나 어미를 통해 아들을 두게 되면 아버지의 이름은 말살되고 가통은 끊어지고, 그래서 가문이 사라진다. 아내라는 타자를 끝(촌)으로 삼아 그 끝에서 생산되는 것이 바로 아들인 것이다. 그러하기에 부부는 무촌이요, 부모자식은 일촌이다. ‘촌(寸)’이 생산의 지점이요, 촌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부녀(婦女)들’인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이름이 ‘姓’이라 불리게 되었으리라 — ‘여자(女)를 통해 났음(生).’ 【물론, 이건 나의 추론 안에서 도출된 결론이지, 실제 이 글자의 생성과정에 부합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하기에 딸은 내 집안에서는 자리가 없다. 남의 집안에서라야 존재의의를 부여받는다. 그러므로 딸은 반드시 출가를 시켜야 한다. 반대로 (큰)아들은 반드시 집안에 머물러야 한다. 이것은 남존여비나 여성차별 이전의 사태다. 체계의 문제요, 질서의 문제요, 더 나아가서는 삶의 문제다. 결코 ‘삶과 유리된’ 체계가 아니다. 철저하게 삶에 밀착되어 있고, 이게 무너지면 삶 자체가 무너지는 그무엇이다. <여우누이> 이야기는 여성이 자기를 짓누르는 체제에 저항할 때 생기는 비극을 그리고 있지 않다. 여우누이는 결코 체제의 희생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 체제에서 적극적으로 양육되었고 그 체제의 혜택을 듬뿍 받으며 자란 자다. 체계에는 빈틈이 없다. 유교적 질서가 이미 확립되어 작동하고 있는 세상에서 다른 생산 방식이 있을 수 있겠는가? 체계 안에만 삶이 있고 체계의 외부는 삶의 외부인 것이다.
여우누이의 집안이 망한 것은 외우가 아니라 내환 때문이다. 게다가 이 내환은, 예를 들면 가장이 병이 든다든지, 가족 중 누가 도박중독이라든지 하는 개별적 내지는 우연적 환란이 아니다. 이 내환은 체계 자체를 붕괴시키는 어떤 문제, 현실을 흩트리고 삶을 무너뜨리는 어떤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그 문제는 바로 ‘딸을 아들보다 사랑함’이다. 딸은 결혼적령기까지 잘 키워서 다른 집안에 보내야 하는 존재인데, 그 딸을 아들보다 더 사랑하게 되면 아들의 위치가 흔들리게 된다. 그러하기에 이 이야기의 제목이 여우‘누이’인 것이다, 여우‘딸’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이 자기 이름을 잇는 아들을 향해야 가통은 이어진다. 딸의 매력에 빼앗겨 아들보다 딸에게 더 마음을 줘버린다면, 제아무리 아들이 셋이나 되어도 집안 붕괴는 막을 수가 없다, 이게 이 이야기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인 것이다(라고 난 본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남존여비를 ‘바탕으로’ 나온 이야기가 아니다. 당대 현실과 그 현실을 지탱하는 체계를 철저하게 고찰하여, 그 현실이 붕괴되는 지점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그것을 어려서부터 확고하게 주입시키는 이야기인 것이다.
결국 누이조차 여우로 여겨 제거할 수 있는 결단이 있어야 가통을 이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일종의 ‘명예 살인’ 결단인 셈이다. 이 ‘제거’의 임무는 부모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부모자식간을 그런 관계로 설정하는 것은 딸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것 이상으로 체계를 흔들기 때문이다. 부모의 마음이야 부모로서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지 않겠는가.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특별히 더 마음이 가는 자식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매혹’이라는 것은 이렇게 우발과 우연에 맡겨져 있기에 예측할 수 없고 체계에 포섭되지도 않는다. 일종의 ‘카오스’인 것이다. ‘더 마음이 가는 자식’이 아들, 그중에서도 큰아들이면(이 체계 하에서 부모는 대체적으로 이런 식으로 형성된다) 아무 문제가 없지만, 혹여 딸이라면 오라비들이 이 사태를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다. 안 그러면 출가한 딸은 여전히 친정을 자기 집으로 생각하거나 아니면 친정을 만만히 봐서 출가한 자기 집안을 위해 이용한다. 두 경우 다 양 집안의 가통을 침해하게 된다. 이게 정리가 안 되면 나중에 재산 문제 등의 실제적인 문제가 불거지게 된다. 드러나지 않았던 누이의 ‘여우임’은 오빠들이 ‘본 것’, 즉 오빠들의 ‘시선(視線)’을 통해 드러나고 또 확정된다. 자기가 본 것을 보지 않은 것으로 여기려 한(=덮어 버린) 셋째 오빠는 결국 여우로 드러난 누이에게 잡아먹히고 만다. 부모와 오라비들을 ‘매혹’시킬 수 있는 누이는 체제의 코스모스의 촘촘한 그물눈에 큰 구멍을 낼 수 있는 카오스인 것이다. ‘알고 보면 여우’일 수 있으니, ‘누이’는 결코 전적으로는 신뢰하면 안 되는 존재이다. 우리 집 누이들도 그렇지만, 특히 ‘들어온’ 누이들, 즉 며느리들은 더욱 그러하다. 누이들에게 매혹되어 경계와 의심을 놓게 되면 잘못하면 집안이 결딴날 수 있다.
아직까지는 우리나라에 위와 같은 질서가 유지되고 있는 듯하다. 우리에게 ‘집안’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이 ‘집안’이라는 체계의 문법은 더욱 복잡해지고 모호해졌다. 기존 문법을 따르면 많은 부분 ‘여성차별’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현실이 변했고, 심지어 기존 체계의 외부가 내부보다 더 현실인 경우도 많이 존재한다. 그러함에도, ‘집안’ 자체가 없어지지는 않았고, 이것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체계의 당위이자 존재의 연쇄를 통해 우리 사회를 여전히 압도하고 있다.
여전히 대안이 없는 현실 속에서, ‘딸’을 둘이나 가진 나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증명된 바는 없지만, ‘가부장 체계의 관성과 힘’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즉 자연적 혈연 관계만 형성되어 있는 경우, 부모에게 딸이 아들보다는 정서적으로 더 키울 맛 나는 자식, 더 끌리는 자식인 것 같다. ‘딸 바보’라는 말은 흔히 사용하지만, ‘아들 바보’라는 말은 거의 들을 수 없다. 최근에는 아들보다 딸을 더 선호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생각했다. ‘아, 진짜 뭔가 바뀌고 있긴 있는 모양이구나.’ 기존 가부장 체계가 내적으로 서서히 붕괴되어가고 있는 전조인 것이다. 제아무리 개명 천지라 하더라도 예전에는 아들 선호가 확고했었다. 아들 선호 시대에 태어난 내 세대까지는 기존 체계의 질서를 완전히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이건 단지 양성 평등의 문제가 아니라 체계의 문제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들보다 딸을 선호하는 시대가 이제 도래하고 있다. 어떻게 변할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기존 체계에서는 <여우누이뎐>이 무섭기는 하지만 ‘교훈적’으로 여겨졌다. 이제 <여우누이뎐>이 그저 ‘엽기적’인 이야기로만 여겨지는 시대가 도래할지도 모른다.

2019-05-15
몇 년이 흐른 지금, 조금씩 뭔가 바뀌어 가는 느낌이 든다… 이 글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