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06, 2015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율법의 직분은 정죄하는 것이요,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다. 정죄한다 함은, 죄를 살아나게 한다, 목숨을 거두어간다는 것이다.

율법과 맞서서 사람은 항상 자기를 의로운 자로 세우려 한다. 적신에서 와서 적신으로, 진토에서 지어져 진토로 돌아가는 진실을 외면하고 아름답고 의로운 보금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문명의 본질인 것이다. 율법의 직분은 이러한 인간의 외식을 찢어발기고 무너져가고 허물어져가는 인간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는 데 있다. 살인의 근원은 어디인가? 간음의 근원은 어디인가? 탐심의 모든 근원은 어디인가? 바로 인간, 그의 육신이다. 모든 더러운 것들은 이 육신에서 나온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그러나 한편으론, 세상에서 의롭다, 좋다, 아름답다 여겨지는 모든 것들 역시 육신에서 나온다는 사실 역시 외면할 수 없다. 인간은 육신에서 나오는 좋고 의롭고 아름다운 것들을 내세우며 율법의 정죄를 면하려 한다. 이렇게 좋지 아니한가! 이렇게 의롭지 아니한가! 이렇게 아름답지 아니한가! 세상은 참으로 조화로우며(κοσμοs) 율법의 정죄의 직분은 그렇게 세상 안에서 순치되고 중화된다. 율법은 듣고 죽을 뇌성이 아니라 읽고 행할 문자가 된다, 돌에 기록된다. 그렇게 세상은 유지되고 그렇게 가이사의 것은 굴러가고 있다. 세상의 법과 질서에는 정죄의 직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세상도 정죄를 한다. 세상 역시 보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하지만 이 정죄는 항상 육체를 중심으로 정의되고 본질상 하나님의 정죄를 정죄하는 쪽으로 기능을 한다 ─ 우리는 의롭다, 세상은 보존되어야 한다. 살인을 하는 자도 이웃을 돕는 자도 모두 육신의 목숨(ψυχη)을 위해 일한다. 그러하기에 모두 육에 속한(ψυκικοs / animalis) 자들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대로, 이들 모두 선(善)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세상의 선과 하나님의 선은 다를 수밖에 없다, 비록 구체적인 목록들이 겹친다 하더라도. 누대에 걸친 인류의 문명과 문화에 대해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라는 판단을 하신, 뇌성을 발하시어 땅을 진동하게 하고 하늘 기초를 흔드신 하나님의 진노를,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헤아려보아야 한다.

율법의 완성인 사랑은, 세상에서 말하는 덕목으로 환원할 수 없는 무엇이다.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 만한 불 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사랑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지 않는 자리다. 돌로 침을 당하지 않는 자리다. 하나님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베푸시는 상(床)의 자리, 잔치의 자리가 바로 사랑의 자리다.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

하나님을 보고도 죽지 아니하는 자리,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열리는 처소, 그곳이 바로 사랑이다.

하나님을 보고 죽지 않고 먹고 마실 수 있기 위해서는 율법의 정죄를 거쳐야 한다. 참으로 육에서는 죽고 영으로 다시 살아나야 한다. 한번 죽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다. 하지만, 몰리고 몰리고, 도망가다 도망가다 결국 잡혀서 자기 죄값을 치르는 죽음이냐, 아니면 육신의 본질을 알고 하나님의 판단을 수용하여 율법이 정죄하는 대로 저주의 자리에서 죽는 죽음이냐. 어느 죽음을 죽느냐에 따라 운명이 갈린다. 전자는 아담 안에서의 죽음이요, 후자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이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똑같은 육신이지만, 아담의 자리에서는 아담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판단을 대적하여 아담처럼 몰려 죽는다. 율법은 육신에게 이기지 못한다. 육신은 항상 율법을 돌에 새겨 율법을 통해 자기 의를 세우고 율법의 정죄를 피하여 낸다.

그러나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셨다. 오직 한 사람, 오직 한 몸, 그는 하나님의 판단을 수용하여 저주받은 자리로 나아간 것이다.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서 죄를 죄라고 정죄하신 것이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징계와 정죄를 거친 아들, 이 아들이 바로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이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사생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십대까지라도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예수께서 열어 놓으신 길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아들의 길, 참 아들의 길이다. 예수께서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 온전하게 되심으로써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 것이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다. 모든 사람은 이 사람의 죽음을 넘어설 수 없기에 이 사람의 죽음을 통해 모든 사람의 죽음이 하나님 앞에서 확정되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 사람이 율법의 정죄를 받아 저주의 자리에 이르렀다면 다른 사람들은 물어 무삼 하리오.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죽었다는 하나님의 판단은 이제 세상에 나타났으며 변경할 수 없다. 예수의 죽음과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예수께 자기 짐을 지운 사람이요, 예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라고 믿는 사람도 예수께 자기 짐을 지운 사람이다. 예수는 이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전자에게는 아들의 피값을 물을 것이요, 후자는 아들의 피를 뿌려 또 다른 아들, 딸로 삼으신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아들의 피와 땀과 수고와 눈물을 알지 못하는 자,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한다.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아들을 내어주고 외면하신 아버지의 그 긍휼을 알지 못하는 자,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