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06, 2015

주님, 제 마음을 주께 드립니다, 기꺼이 그리고 오롯이

칼빈 기념 주화

이 글 제목의 글귀(Cor meum tibi offero, Domine, prompte et sincere)는 칼빈의 좌우명으로 알려져 있다. 위 사진은 17세기에 나온 칼빈 기념주화인데, 보면 알겠지만, 자기 심장(마음)을 손에 올려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 모습이다. 주화 가장자리에 적혀 있는 글귀와 이 글의 제목은 일맥상통한다. 이 엠블럼은 유명한 어느 신학교의 로고이기도 하다(이 페이지를 보라). 나는 이 짧은 문구가 칼빈 경건의 핵심을 요약하고 있다고 본다. 더욱 심오한 것은, 이 경건이 그의, 성경에 대한 해석학적 출발점과 연결되어있다는 것이다.

원래 이 글귀는 칼빈이, 제네바의 청빙에 응하여 제네바로 다시 복귀하라는 파렐의 요청에 답하는 편지에 등장한다. 칼빈 자기는 청빙을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기에, 주님의 뜻이 제네바로 복귀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그리고 오롯이 내 마음을 주님께 드려(=제사하여) 주님의 뜻에 순종하겠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등장하는 글귀인 것이다.

여기서 잘 드러나듯이, 칼빈의 경건은 ‘자기 자신’과 ‘하나님의 뜻’이 대립될 때 기꺼이 자신을 포기하는 데에 요체가 있다. 이 ‘자기’는 고립된 존재가 아니다.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그리고 시대적으로 긴밀한 네트워크 가운데서 형성된 존재다. 그리고 이러한 네트워크를 통해 ‘자기’가 추구하는 바는 우선은 생존이요, 다음은 번영이다. 칼빈 역시 여러 상황과 여건을 고려한다면 제네바로 복귀하는 것은 ‘자기’에게 해가 됐으면 됐지, 유익될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복음의 진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파렐의 말대로 제네바에 복귀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라는 것을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그는 ‘자기’의 생존과 번영을 뒤로하고 하나님의 뜻이라 확신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자신의 이러한 선택을 칼빈은 이 글의 제목으로 요약을 한 것이다―“주님, 제 마음을 주께 드립니다, 기꺼이 그리고 오롯이.”

이렇게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면 이 마음의 ‘운동방향’은 어느 쪽일까? 위쪽이다. 마음을 주님께 드린다고 할 때, 그 드려지는 마음은 하나님 쪽으로, 즉 ‘위’로 움직인다. 마음은 ‘자기’ 안에 있을 때, 자기가 그물처럼 얽혀있는 그 네트워크 안에 있을 때는 자기와 분리되지 않는다. 사도들이 ‘세상’, ‘이 세대(현세)’라 부르는 이 네트워크는 곧 ‘마음’이며, 곧 ‘자기’인 것이다. 오직 마음의 할례를 받아 마음이 찔러 쪼개진 적이 있는 사람만이 ‘자기’에게서 자기 마음이 잘려나갔음을 볼 수 있다. 분명 마음이 여전히 내 안에 있지만, 이제 나는 그것을 ‘자기’ 안에서 떼어내어 ‘들어올릴 수’ 있는 것이다. 예전에는 없던 ‘손’이 생겨 내 마음을 하나님께 높이 들어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칼빈은 이 마음을 성경, 특히 구약을 읽는 지평을 규정하는 데에도 끌어온다. 성경이라는 책은, 이게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 해도, 세상의 여느 언어로 나타날 수 있고 여느 책의 형태를 띠고 나타날 수 있다. 성경의 물질성 자체는 세상, 이 세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하기에 성경은 항상, 세상과 이 세대라는 네트워크에 매인 상태로 읽히고 해석되기 십상이다. 칼빈에 따르면 성경, 특히 구약 역시 그렇게 읽을 수 있다. 구약에 나오는 이 세대에 속한 부(富)와 복(福)은 그저 이 세대의 것으로 이해되고 추구되기 십상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 세대에서 부유하고 복을 받은 사람들의 하나님으로 여겨지게 된다.

그러나 칼빈은 단호하게 말한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현세적 복들은 그 ‘이면’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구약에 등장하는 제사들과 의식(儀式)을 규정하는 계명들은 그 이면까지 이르지 않으면 그저 헛되고 어리석은 것들일 뿐이라고. 그래서 이 모든 것은 ‘상징’이라고. 상징은 항상, 상징 ‘이면’의 것을 증언하고 가리키는 그 무엇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의 이면은 무엇인가? 칼빈에 따르자면 ‘그리스도 예수’다.

복음은 분명 사람들의 마음을 현세에서 즐거움을 찾는 데에만 가두어두지 않고, 그 마음을 높이 들어올려서 불멸의 생명을 소망하는 데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이 땅의 쾌락거리들에 매어두지 않고, 하늘에 있는 소망을 선언함으로써, 말하자면 그들을[혹은 ‘마음을’(내가 추가)] 그리로 옮겨가게 해 주는 것이다.1)

통용되는 다섯 개의 종교개혁의 기치들은 다음과 같다.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 ‘믿음만으로(sola fide).’ ‘은혜로만(sola gratia).’ ‘그리스도만이(solus Christus).’ ‘하나님께만 영광이(soli Deo gloria).’ 여기에 ‘전체 성경으로(tota Scriptura)’를 하나 더할 수 있겠다. 이러한 기치들은 그저 구호로 그쳐서는 진영 싸움에밖에 동원되지 않는다. 진영 형성과 편가르기를 넘어, ‘경건’의 자리로 나가야하는 것이다. 칼빈의 좌우명은 위 기치들을 경건으로 통합할 수 있는 실마리를 던져준다.

사람 수만큼이나 많은 경건‘들’이 있겠지만, 종교개혁의 입장에서 경건의 참됨은 항상 ‘성경을 어떻게 읽느냐’에서 판가름이 난다. ‘성경만으로’라는 기치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리스도만이’ ‘전체 성경’의 시작이요, 끝이어야 한다. 이럴 때라야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아간다. 성경을 이 땅의 것을 목적으로 읽는 것은 참된 경건이 아니다. 제아무리 높은 윤리와 고상한 덕목들로 채워져 있다 해도 성경읽기가 결국 땅의 것을 위해 존재한다면 읽는 자의 마음은 여전히 세상과 이 세대에 붙박여있는 것이다. ‘자기’는 항상 성경을 자기 인생, 그리고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과 이 세대를 위해 읽으라 한다. 자기는 항상 자기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성경을 집어 든다. 그러나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 마음을 높이 하나님께로 들어올려, 상징들 넘어 계시는, 일체의 상징들이 오롯이 증언하는 그리스도 예수, 그리고 그분의 아버지 하나님에게까지 나아가야 한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


  1. ≪기독교강요≫, 2.10.3(원광연 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