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 예수는 분명 그 자체로 하나님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만약 그러했다면 고대교회에서 성자 신성 논쟁 자체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분은 분명 마리아라는 구체적인 역사적 여인을 통해 세상에 육체로 오셨고 그렇게 사람으로 사셨다. 그러나 그분은 또한,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신 것이 되었다. 여기에 문제의 근원이 있다.
이것은 부활하신 그분을 ‘나의 주(여호와)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도마를 통해 확증된다. 이 고백은 여호와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한 숱한 시편기자들과 선지자들의 외침을 반영한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여호와라는 이름이 드러낸 현실을 근거로 그분을 하나님으로 부른 반면, 도마는 예수라는 이름이 드러낸 현실이 곧 여호와 이름 안에 담긴 현실과 같다는 것을 우선 고백한다. ‘나’(도마)가 예수를 여호와로, 그리고 그 ‘주(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신 이’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여기에 예수께서는 안 보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대답하시는데, 이것은 도마의 고백을 부인 내지는 평가절하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몸은 (율법을 주시고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신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함이다. 즉 예수님의 육신을 보는 게 아니라, 그 진실한 육신을 통해 진실로 말씀을 보(고 만지)는 것이 예수님을 ‘진실로 진실로’(아멘 아멘) 보(고 만지)는 것이다. 진리의 말씀을 듣고 진실로 믿는 자가 복된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요 1:1에 단적으로 요약되어있다. 요한복음은 이러한 일관성을 철저하게 끝까지 관철한다.
그러므로 예수님 신성의 핵심에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인, 여호와라는 이름이 놓여있다. 자칭 여호와라고 이름하는 그 신, 구약의 그 신의 이름을 모자람 없이 장악하는 분이 예수라는 것이다. 여호와 이름 안에 있는, 여호와께서 나타내신 모든 것, 즉 그분의 행위와 마음은 이제 오롯이 예수라는 한 몸에 관 씌워진다. 예수 그분이 진작부터 여호와 하나님 품속에 숨어있던 하나님의 뜻, 마음, 말씀, 즉 독생자(獨生子)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신성은 선험적으로 알려지거나 전제되지 않는다. 오직 기록(고정)된 말씀에서부터 신성은 증거된다. 여호와라는 이름이 알려지고 확증되는 유일한 처소가 바로 구약성경이고 구약의 증거를 따라 예수님은 오셨기 때문이다.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이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기에 예수 그리스도도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은 우선은 서술이 아니라 은유다. 증거[μαρτυρία]로써 증명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증거로 확증되고 난 다음에야 서술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예수님과 구약의 관계에 그대로 해당된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은유적 은폐(숨김)는 그리스도라는 비밀을 계시함(드러냄)과 항상 함께한다. 단지 증인들로 복무하고 간 사도들, 선지자들조차 ‘성인(聖人)’들이 되어 숭배되고 있다―장로들의 전통(마 15:2, 막 7:3).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는 것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사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