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충격이 컸고 언니와 저만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말을 맞추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1)
이른바 ‘말을 맞춘다’는 것은 거짓 증언을 하는 것이다. 즉, 증언이 담지하고 있는 효력은 그대로 취하되, 증언의 참됨을 버리는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대놓고 거짓을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러하기에 보편적 시각에서 거짓말하는 일은 악한 것으로 규정되어 있으며, 여기에 원리적 차원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말을 맞추고 거짓 증언을 하게 되는 상황은 어떤 상황인가?
우리가 모세 율법을 보면 어떤 사람을 정죄하기 위해서는 어떤 한 사람만의 고소로 가능하지 않고 두 세 증인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두 세 증인에 해당하는 사람이 정죄당할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서 증언을 하지 않는다면 그의 ‘죄’ 자체가 성립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행위는 사실 양면성이 있다. 그러함에도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결국 증언도 긍휼의 문제라는 것이다.2) 그러나 긍휼은 항상 '증인들'의 편에서만 발휘될 수 있다. 재판자는 일단 '증언'으로 성립된 죄를 불편부당하게, 공정하게 판결해야 한다. 재판자는 결코 긍휼을 베풀어서는 안 된다. 긍휼을 베풀기 위해서는 증인, 즉 '보혜사'의 자리에 서야한다.
말을 맞추어 거짓 증언을 하는 것은 방금 말한 내용과 완전히 반대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을, 혹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을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렇게 말을 맞추는 사람들에게는 무엇이 없는가? 긍휼이다. 그들의 증언 가운데는 오직 살의와 탐욕 그리고 두려움만 존재한다. 거짓 증언은 이렇게 긍휼이 없을 때라야 자행된다. 거짓 증언의 거짓이 덮이고 숨겨진다면 재판자가 제아무리 공정한 판결을 해도 그 판결은 거짓 판결이 되어버린다.3)
- [인터뷰] '그 자리'에 있었던 장자연 동료 "그분 배우자가 검사, 내 진술은…" 중 ↖︎
- 율법에서 이런 긍휼이 발휘되는 것은, 살인죄 같이 목숨을 요구하는 것이 정당한 죄에서보다는 오히려 간음 같이 실제 목숨을 요구하지 않는 죄일 것이다(예: 요셉). ↖︎
- 증언은 사실 모든 확정된 일에 적용되는 개념이다. 모든 일어난 일은 ‘지금, 여기’의 순간이 지나면 기억 속으로 들어간다. 그 일 때문에 생긴 사물들, 없어진 사물들이 없다면 오직 증언만이 그 일을 확정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