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이다. 서구의 전통적 신학은 이 질투를 ‘본성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 ‘당하는 것(passivum/passio)’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며, 이것은 하나님 본질에 속하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결핍(privatio)이 있는가? 결핍은 분명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은 유아독존의 단자(單者)가 아니라 ‘공동체적’ 존재이시다. 즉, 하나님의 질투는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는 행위와 분리시킬 수 없다. 물론, ‘본래’ 하나님의 품속에 계셨던 독생자에게서 사랑이 질투로 드러날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들을 낳으시는 분이 동일하게 창조하신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즉 하나님 ‘종류’(창 1)대로 만드신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결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넘치는 사랑과 긍휼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이 사랑은 아들을 향한 사랑, 자녀에 대한 사랑, 신부에 대한 사랑이다. 자녀가, 신부가, 백성이 (독생자와는 달리) 사랑을 외면하고 각기 제 길로 간다면 사랑은 이제 죽음보다 더 강한 질투로 드러나게 된다. 사랑의 이면은 질투다. 그러나 하나님의 질투와 사람의 질투는 같지 않다. 사람은 질투하는 대상을 생명으로 여긴다는 측면에서는 하나님과 같으나, 그 질투하는 대상에게서 받으려, 더 나아가서는 뺏으려 한다는 점이 다르다. 하나님은 생명을 받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주신다. 그러므로 질투도 긍휼과 연결이 된다.
이 질투를 사람의 기준에서 결핍으로 이해하는 것은 맞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는 단지 신인동형론(anthropomorphism)으로 이해하는 것도 부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