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15:29)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고전 15:30)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죽은 자들을 위하여 받는 세례는 바울이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것은 여기 말고는 역사적으로 보도된 일이 없다. 따라서 이 세례는 ‘죽은 자들은 부활하지 않는다, 부활은 없다’고 주장하는 고린도교회 어떤 사람들이 고수하는 행습이라 할 수 있다. 즉, 부활이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나올 수 있는 논리적 결론이라고 추론해 볼 수 있다.
부활이 없다면 모든 것이 이 세대에서 마무리되며, 이 세대의 삶을 최대한 잘 사는 것이 중요해진다. 그러나 부활이 없다는 주장은 전적인 소멸설은 아니다. 신구약의 큰 틀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죽고 나서는 육신의 부활 없이 그냥 하나님 곁에 죽 거한다는 주장 정도다. 즉, 육신의 부활이라는 것은 굳이 필요하지 않으며, 그러하기에 육신의 부활은 없을 것이라는 주장 정도로 재구성해볼 수 있다. 이러한 틀에서 세례도 재구성된 것이다. 세례를 없애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이라 자처한다면 불가능한데, 이는 예수께서 직접 세례를 명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은 길은 세례를 자기들 식대로 재해석하는 것이다. 세례에서 부활의 의미를 제거하는 것은 쉽지 않은데, 이들은 세례를 ‘죽고 난 뒤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에 대한 표/인침’ 정도로 재해석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여기서 더 발전하면 단지 표나 인침이 아니라 일종의 공로 내지는 수단으로도 이해할 여지가 있다. 따라서 본인이 세례를 받는 것은 당연하고, 믿음이 모호하여 혹은 여러 다른 이유로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사람들, 더 나아간 논의를 하면 믿음이 없던 사람들을 위해서도 지금 믿고 있는 사람이 세례를 ‘대신 받아줄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다시금 세례와 부활의 공고한 연결을 상기시키고 있다. 부활이 없다면 세례가 무슨 의미가 있냐는 말이다. 세례는 전적으로 부활한 몸에 대한 것인데, 도대체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까지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부활을 왜 인정 안 하냐는 힐난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라는 구절을 볼 때 이들이 완전 소멸을 주장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완전 소멸보다는 ‘몸의 연속성’을 주목한 게 아닐까 한다.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므로 부활 전에 더럽게 굴리는 것은 부활 후를 고려할 때 좋지 않다, 이 정도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