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0, 2019

페티시즘과 하나님

페티시즘은 어떤 ‘상상적 강제자’에 의해 화폐와 상품 등의 교환이 불가역적인 상태로 고정되는 것을 말한다. 생존을 위해서는 교환을 벗어날 수 없으며, 이는 강제된다. 마치 교환을 강제하는 어떤 권력자가 존재하듯이. 이 존재가 생산물을 분배하는 것으로 상정된다. 주고 받는 관계 속에서 이 존재는 ‘그 자체의 상황에서는’ 숨겨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자는 단지 상상의 산물이 아니다. 그렇다고 인식되고 묘사된 그대로 실재(實在)하는 것 또한 아니다. 그것의 정체는 다름 아닌 ‘사람’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람의 수치심과 탐심이다. 줄 수 있어서, 빚을 지울 수 있어서 느끼는 우월감의 이면은 수치심이다. 주는 자는 항상 자기가 주는 것과는 다른 것, 그러나 자기가 준 것과 (최소한) 동등한 혹은 그 이상의(= 이자가 포함된) 가치량을 가진 것을 받기를 의도하며 주는 것이다. 이것이 공평이며 공의며 정의다. 그러므로 받는 자가 즉각 되돌려 줄 수 없다면 그는 항상 채무감(≒ 의무감)에 시달린다. 이는 수치심으로 나타난다. 스스로 불의한 자가 되었다는 부끄러움이 그를 지배한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주는 자는 예외 없이 탐하는 자다. 이는 탐심이 ‘최소한 준 것 만큼은 받는 것’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탐심은 곧 권리/권력/권위/자격이며, 탐심의 실현이 곧 공의며 정의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인가? 간단히 말하자면 사람 일반이라 할 수 있다. 굉장히 이상하지만 실로 그러하다. 이는 모든 사람이 수치심과 탐심으로 움직이는 데서는 (구체적인 부분들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완전히 동일하기 때문이다. 권력자는 이 사람 일반의 자리를 꿰뚫어보고 그 자리에 진입한 자이거나 공동체가 명시화한 그 자리에 여러 절차를 통해 진입한 자다. 그 자체의 상황에서는 숨겨져 있는 사람 일반이 명시화된 것이다. 이렇게 한 사람의 세움으로써 사실은 사람 일반이 다스리고 있다는 것이 숨겨진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권력자는 자신이 다스리고 있다는 환상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공동체에 심어주게 된다. 그러나 굳이 구체적인 개인을 상정하지 않아도 공동체가 운영되는 이유는 모든 사람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이 형성한 공동체는 여러 의지들을 한 몸에 통일시키는 개인이 다스리는 길 말고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사람 일반에 구체적인 개인을 세우지 않고도 다스려짐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민주정(民主政)이 있다. 민주정에서는 사람 일반을 명시화시키지 않고 그 자체의 상황 그대로 숨겨진 채 두려고 한다. 그래서 사람 일반이 아니라 구체적인 모든 개인‘들’이 다스리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준다.

모세율법에 등장하는 제사는 주고 받음의 체계다. 그러나 사람 일반의 자리에 여호와 하나님이 들어가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드러내고 명시화한다. 그러므로 모세율법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주고받음이 어떠한지가 명시적으로 드러난다. 인간과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주고 받음의 체계라도 페티시즘을 형태를 띠고 나타날 수밖에 없다. 모세율법 역시 분명 페티시즘의 형태를 띠나 그 가운데 어떤 다름이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페티시즘의 형태를 띠기에 페티시즘으로 화하는 것은 매우 용이하다. 선지자들의 고민의 요체가 바로 이 언저리에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