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09, 2019

삼위일체론의 한 하나님과 삼위

한 하나님, 신성, 본질 등의 말들이 난무한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이른바 이해불가한 지점은 바로 언어의 흐물거림에서 나온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삼위일체‘론’은 같은 것이 아니다. ‘론’으로 넘어가야 우리가 알고 입을 댈 수 있는데, 론(論)은 어떻든 언어가 개입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개입하는 ‘언어’는 그 출처가 ‘성경’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성경이라는 계시가 개입된 후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실상이 아버지, 아들, 성령 그리고 한 하나님임을 알게 된다. 물론, 이는 ‘사위일체(四位一體)’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삼위일체론의 핵심은 ‘한 하나님은 삼위로, 삼위는 한 하나님으로 계신다’이기 때문이다.1)

그러므로 한 하나님은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관계 지어진 페리코레시스다. 삼위 중 한 위라도 누락되면, 혹은 다른 존재가 섞이면 한 하나님이 되지 못한다. 연합이 깨어지기 때문이다. 연합이 깨어지면 연합하고 있던 각각의 위들은 각각 분리된 객체가 되며 이는 ‘하나임’을 제거한다. 이러한 페리코레시스만이 성경의 직접적 증언이 될 수 있다(예: 시 110, 그외 신약의 ‘우편’을 말하는 구절들). ‘아버지의 우편에 좌정하여 보혜사 성령을 부으시는 아들’은 각각 세 개의 거처를 마련하고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 하늘 보좌에 다 함께 거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각각의 위는 ‘그 자체로는’ 하나님이 아닌가? 이것은 두 방면으로 생각해야 한다. 하나는 삼위 하나님의 연합과 분리되었을 때 아버지, 아들, 성령은 여전히 각각 하나님인가 하는 물음이다. 여기에는 성경 자체가 이미 답을 하고 있다―그렇지 않다. 그들은 단지 우상일 뿐이다(선지서-계시록). 우상 역시 소위 ‘신성’을 담지한다. 그러나 일반론적 의미에서 신성을 담지하는 것이 곧 ‘복음이 말하는바 하나님’ 되기 위한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따라서 성경에 나타난 혹은 나타나지 않은 여러 모습들을 근거로 아버지, 아들, 성령 각각의 분리된 신학을 전개해봐야 그것은 일종의 ‘우상론’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기복신학(아버지), 인격적 모델 신학(아들), (섭리론, 기독론, 교회론과 따로 노는) 보편적 영성 신학(성령). 이들 신학이 문자적으로 삼위의 관계를 상정한다 하더라도 이들 신학을 근본적으로 추동하는 것은 한 하나님에서 분리된 어떤 삼위의 어떤 특정한 부분일 뿐이다.

그러나 삼위의 연합을 전제할 때 각각의 위는 그 자체로도 하나님이다. 아니, 하나님일 수밖에 없다. 삼위가 하나님으로 연합한다는 것은 ‘보내시는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기뻐하는 독생하신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과 독생하신 하나님이 보내시는 보혜사 하나님’으로서 연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 위 중 하나에라도 피조물 혹은 인간이 만든 우상이 들어가게 되면 연합은 없는 것이 되며 삼위 모두가 우상으로 화하게 된다. 이 연합, 이 관계는 창세 전에 이미 있었고, 그러므로 영원하다. 창조를 비롯한 삼위 외적 사역은 이 연합 안에서 이루어진 사건이며, 그래서 어느 한 위에 배타적으로 귀속되지 않는다.

내재적 삼위일체론을 수학적 공리 같이 쓰면 안 된다. 공리가 되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우상론이 된다.2) 그러나 내재적 삼위일체론은 경륜적 삼위일체론과 연결시켜서만 써야 한다. 내재적 삼위일체론에 연결될 수 있는 삼위일체론 버전은 오직 성경을 바탕으로 한 경륜적 삼위일체론일 뿐이다. 경륜적 삼위일체론이라 함은 궁극적으로 삼위의 관계를 해명하는 삼위일체론이다. [물론, 내재적 삼위일체론이 기본적으로는 창조와 경륜 이전, 하나님 내부를 설명한다는 사실은 항상 명심해야 한다.] 성경의 구체적 진술들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궁극적인 목적이 피조물의 어떠함 중 한 국면을 해명하기 위한 것이라면 경륜적 삼위일체론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경륜적 삼위일체론은 사회 이론이나 윤리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경륜적 삼위일체론에 포함되어 있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들과 연합한 사람들’을 해명하다 보면 피조물에 대한 어떤 함의가 도출될 수는 있다(예: 바울 사도, 요한 사도, 베드로 사도 등).

삼위일체 하나님(‘론’ 말고)의 실상은 언어화, 기호화될 수 없다. 그저 주시는 분과 나오는 분만이 있을 뿐이다. 이 관계를 가장 최소화된 언어로 일컫는다면 ‘사랑’이다. 그러나 이제 아들이 세상에 오실 때 ‘여자에게서 나고 율법 아래에 나서’(갈 4:4) 언어와 기호의 체계로 들어오게 된다. 즉, ‘우상들의 세계’로, 경제적 교환(빚, 종됨)의 체계로 오시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삼위의 영원하신 관계는 해소되지 않는바, 삼위 하나님의 일하심은 우상들의 세계에서 항상 ‘속량’과 구원으로, 해방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 역시 ‘사랑’이다. 그러나 삼위가 관계되어있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는 하나님이 독생자를 세상에 주시고 아들이 보혜사를 주시는 것에서만 피조물에게 알려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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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소위 ‘믿음의 방패[scutum Fidei]’ 혹은 ‘삼위일체의 방패[scutum Trinitatis]’라고 불리는 아래 도상이 이를 (서방의 관점에서) 요약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
  2. 예를 들면, 삼위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고수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었다는 사실에 물타기를 시전하는 것. 여기서 ‘저주’의 맥락을 희석시키면 그리스도의 고난이 훼손된다. 동방교회의 삼위일체 신학에 종종 발견되는 오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