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일 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요한 사도의 위 말씀은 교회론에도 중요한 하나의 입각점을 제시한다. 우리나라에서 ecclesia에 대한 역어로는 ‘가르칠 敎’를 써서 ‘敎會’라는 단어를 채택해왔다. 이 역어의 역사를 자세히 알지는 못하나, 어쨌든 한자 문화권에 통용되는 것 같긴 하다. 기본적으로 교회를 가르친다는 측면에서 규정하는 것이다. 소위 교도권(敎導權)을 중심으로 교회를 정의한다.
그러나 나는 ‘가르칠 敎’가 아니라 ‘사귈 交’를 써서 ‘交會’라고 쓰는 게 ecclesia의 역어에 좀 더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위 구절에 보면 ‘전함’이 나온다. 전해진 내용이 있으니 일종의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가르침이라는 활동은 매우 폭이 넓은 활동이다. ‘사람이 말한다’와 ‘사람이 가르친다’는 서로 등치(等値)할 수 있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가르침이 교회를 이루지는 못한다. ‘교회를 이루는 가르침’이 분명히 있다. 그 가르침은, 위 요한 사도가 말씀하신 대로,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 그리고 이들과 사귀는 무리와 사귐’으로 이끄는 가르침이다. 이런 가르침을 하는 무리(ecclesia)가 바로 교회이며,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가르침은 ecclesia의 마지막이 아니다. 사귐이 마지막이고, 가르침은 방편이다. [물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방편과 마지막(telos)이 분리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무엇인가, 이렇게 물었을 때, 한 마디, 아니, 한 글자로 대답한다면 敎와 交 중 무엇이 더 나을까? 가르침일까, 사귐일까? 나는 후자로 본다.
여기서 덧붙이고 강조해야 할 사실은, 사귐은 또한 반드시 가르침으로 시작하며, 가르침으로 유지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사귐의 중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