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본래 높아지려고 하는, 교만하고 완악한 존재다.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 무장하여 하나님 같이 되려 한다.
이러한 교만을 하나님은 두 종류의 막대기와 채찍을 통해 견제하신다.
- 율법
- 밥그릇
사람이 1, 2 모두 초월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면 본래 사람에게 속한 완악함이 발현되어 방자해진다. 2를 걱정하지 않을 위치, 초월한 위치가 되더라도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율법이 되는 사람은 적어도 방자해지지는 않는다. 이러한 상태를 조금 고상한 말로 ‘자아 성찰’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누가 정말 악한 일을 자행한 게 아닌 담에야, 그 사람을 온갖 계명들을 동원해 죽일 놈으로 만든다든가, 온갖 이해 관계를 동원해 그의 밥그릇을 끊어버리는 일은 사람으로서는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어떤 사람이 추종하는 율법이 정말 악하거나, 아니면 그가 먹고 있는 밥그릇이 사회와 사람들에게 해악이 되거나 할 때는 정죄하고 끊어버릴 수 있겠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마음에 드는 것(= 아름다운 것)/안 드는 것(= 추한 것)을 ‘선악’의 기준으로 삼으면 안 된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을 하실 수 있는 분은, 원칙적으로는, 한 분뿐이다.
요새는 밥그릇이 SNS와 분리되지 않는 시절로 접어드는 것 같다. 맥루한을 조금 응용해보자면, 재래의 세계에서 ’장터/장마당’의 역할을 이제 SNS가 일정 부분 넘겨받은 것 같다. 장터는 한 지역의 사람들이 소통하는 공간인 동시에, 그들이 물건을 사고 팔며 밥그릇을 형성해가는 공간이기도 하다. 누가 장터에서 남의 좌판이나 가게를 해코지하고 사기 치고 다니면 법적으로까지 제재를 가해야겠지. 하지만 누가 좀 시끄럽게 장사하고 눈꼴신 모습이 보인다고 해서 와르르 몰려다니며 왕따 시키고, 심지어 밥그릇까지 차서는 안 되는 것이다. 상도(商道)는 지켜야 하는 것이다.
미추가 선악이 되는 사회는 파시즘에 취약해진다. 앞으로 세계가 어떻게 바뀌어갈지 우려가 되는 부분이 많다. ‘괘씸죄’는 꼭 권위주의만을 뿌리로 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