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책을 대충 훑어보고 사지는 않았던 기억이 있다. 제목이 매우 기괴한, ≪노 데이팅≫이었는데, 원서 제목(I Kissed Dating Goodbye)보다 오히려 책 내용을 더 잘 요약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튼, 그는 거룩과 순결을 ‘어떤 일을 하는/하지 않는 것’으로 규정한다는 느낌이 있었고, 나는 이런 식의 신앙 이해를 동의하지 않았다/않는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일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어떤 신념을 받아들이거나 안 받아들이는 것으로 (단순히) 규정되지 않는다. 물론, 신앙에는 여러 사안들에 대한 입장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심지어 세계관을 형성하기도 한다. 내가 이런 측면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함에도 신앙도, 삶도 그렇게 무 자르듯이 딱딱 자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딱딱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믿는 나’를 ‘예스 or 노’의 다발들로 규정하려 하면 결국에 가서는 ‘믿는’이 아니라 ‘나’가 강화된다. 티끌만한 오류도 없어 보이는 정통 교리들조차 ‘바르게 믿는 나’를 위한 재료로 동원되기 마련이다. ‘덕목으로서의 겸손’을 제아무리 패치한다 하더라도 이것 역시 ‘겸손한 나’로 환원되어 ‘나’를 강화한다. ‘미국 복음주의 개신교’는 미국답게 이런 경향을 자주 드러낸다. (미국답게) 전통적으로 알미니아니즘이 강세였는데, 요 이십여 년 간 칼비니즘이 꽤 확장되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한번씩 들여다보면, 칼비니즘조차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구원해주신 나’에서 출발하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종교개혁 그리고 서양 기독교 라인에 있는 교회들 전반에 나타나는 문제이긴 하지만, 미국에서 좀 더 뚜렷하게 나오는 듯하다. 교리들이야 거룩하고 선하다. 그러나 그 교리들로 스스로를 규정하고 거룩하고 선한 존재로 드러내려 하는 ‘나’는 죄인이다.
조슈아 해리스는 인스타그램에서 아래와 같이 썼다. 그는 신앙을 떠날 때도 스스로를 규정(defining)하고 있다. 그가 여기서 말하는 measurements는 바울의 용어로 번역하자면 ‘노모스’, 즉 율법에 상응한다.
The popular phrase for this is ‘deconstruction,’ the biblical phrase is ‘falling away.’ By all the measurements that I have for defining a Christian, I am not a Christian.
그간 목회의 어려움과 이혼의 아픔을 겪은 그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 그리고 ‘자기 규정’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은 것을 입으로 시인하는 ‘고백’이 언젠가 그에게서 나오기를 잠시 하나님께 기도드린다.
위에서 언급한 자기 저서에 대한 최근 그의 입장. 더 이상 자신의 책에 동의하지 않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