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18: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여기서 여호와의 도, 의, 공도가 등장한다. 이것은 무엇인가? 일단 2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 고모라의)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죄가) 심히 무거우니”라고 되어있다. 부르짖음의 소리는 고통을 ‘주는’ 소리, 그리고 고통을 ‘당하는’ 소리다. 무엇이 소돔과 고모라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했는가? 이 원인이 바로 죄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의는 이것과 반대되는 것이다.
우리는 18장과 19장에 두 번의 ‘손 대접하기’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두 천사를 영접하고 대접했다.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그러나 이 두 천사가 소돔 롯의 집에 머물렀을 때 롯은 그들을 영접했지만, 소돔 사람들은 그들에게 강포를 행했다. 소돔의 죄는 바로 이것이다. 강포를 행하는 것, 도둑질하는 것이다. 이것은 육에서 나오는 열매, 첫 사람 아담의 가지에서 맺히는 열매다. [단지 동성애의 죄악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것이 아니다.] 소돔은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 나무처럼 하나님의 영생의 열매를 맺지 못했다. 그러하기에 뺏고 뺏기는 상황이 이들의 현실이 된 것이다. 이는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여 하나님께 물로 심판을 받은 창 6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뺏고자 하며 부르짖는 이 현실로 인해 그들 가운데 항상 고통당하며 부르짖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들의 부르짖음이 여호와 심판의 근거가 된다. 당장 무너지지 않았지만, 이들은 유예된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살고 있었던 것이다. 즉, 이미 심판의 불 안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창 19:28, 벧후 3:7). 왜 불이냐? 소돔과 고모라는 노아의 물 심판 이후 드러난 땅에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미 물 심판을 통과했는데도 나타난 포악함과 강포인 것이다. 옛 세상보다도 일곱 배나 더 악한 세상이다.
그렇다면 소돔과 고모라에서 의(義)는 무엇인가? 성을 버리고 나오는 것이다. 만약 고쳐 쓸 수 있는 현실이었다면 여호와께서 불로 멸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불로 소멸하심, 이것이 이 두 성에 대한 여호와의 판단(심판)이다. 이 심판이 의롭다. 그러므로 소돔과 고모라에서 의인(義人)은 기본적으로 여호와의 이 판단을 수용하고 그에 따라 행하는 것, 즉 ‘버리고 나오는 것’이다. 물론, 의인은 그들이 버리고 나오기까지 최대한 소돔과 고모라 주민들의 강포와 악행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분명히 알 것은, 자기들이 스스로를 의롭다, 나는 이들의 고통과 관련 없다, 아무리 말해도 그 현실에 머물고 있는 한 그 죄와 완전 무관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고쳐 쓰려고 하면 성과 함께 멸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여호와께 항의를 한다.
(창 18:23)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창 18:24)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이게 무슨 말일까? 아브라함 생각에 성 자체를 멸하는 것은 불의하다는 것이다. 왜? 거기는 죄인과 의인이 함께 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 중에 분명 아브라함이 판단하기로 선한, 그러므로 의로운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 도시를 멸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의와 불의의 기준이 사람의 선함과 의를 따르지 않는다는 말이다. 동성애 같은 특정 죄 때문에 두 도시가 멸망을 당했다면 이 죄를 짓지 아니한 사람들이 함께 멸망 당한 일은 불의한 일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불의하다고 판단하신 것은 소돔과 고모라라는 현실 자체다. 소돔과 고모라만 특별하겠는가? 세상이 사실은 소돔과 고모라 아닌가.
아브라함은 여호와께 항의하다가 이 사실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는 의인들이 있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한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여호와께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라고 물었다는 사실 자체가 소돔과 고모라에 도덕적으로 봤을 때 악하다고만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방증한다. 그렇다면 여호와께서 뜻하시는바 ‘의(義)’는 아브라함 자신의 그것, 온 땅(세상)의 의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여호와 앞에서 자기 현실, 자기 생명, 자기 의로 의로워질 인생은 하나도 없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이 의가 되는가? 빠져나오라는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의가 된다. 말씀에 믿음을 화합하는 것이 의로운 행위인 것이다. 이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자신과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의 생명을 건지게 된다.
(창 19:14)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 (창 19:15) 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이르되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어 내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
그러나 소돔의 현실은 여호와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는’ 현실이다. 여호와의 말씀은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믿음 없음이 그들과 그들에게 속한 사람들을 멸망으로 인도한다. 믿지 않음이라는 불의가 모든 사람을 멸망하게 하는 것이다.
롯은 여호와께 자비를 입는다.
(창 19:16)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
이 자비가 롯에게 의로 임한다.
(벧후 2:7)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그는 ‘빠져 나와 건짐 받은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뒤를 돌아본 롯의 아내는 정죄를 받아 소금기둥이 되었다(창 19:26). 그러나 아브라함과 다른 유업을 선택한 롯이 이른 곳, 결국 그에게 유업이 된 성은 소알, 즉 ‘작은 곳’이었다. 그는 일관되게 여호와께 ‘자기 목숨’을 구한 것이다. 자기 목숨을 위하여 얻은 유업이 바로 소알이다.
(창 19:20) 보소서 저 성읍은 도망하기에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를 그 곳으로 도망하게 하소서 이는 작은 성읍이 아니니이까 내 생명이 보존되리이다
그러나 소알 역시 롯에게 평안을 주지 못한다. 왜 롯은 두려워했을까? 소알 역시 소돔과 고모라와 다를 바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곳도 여호와의 소멸하는 불 가운데 임시로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소알은 다름 아닌 지금 세상이다. 세상은 사람들의 눈에는 크고 넓은 곳이지만 하나님 심판의 불 가운데 임시로 보존되어 있는 곳, 하나님 보시기에는 작은 곳이다. 결국 롯이 두려워하여 찾은 곳이 바로 굴이다.
(창 19:30) 롯이 소알에 거주하기를 두려워하여 두 딸과 함께 소알에서 나와 산에 올라가 거주하되 그 두 딸과 함께 굴에 거주하였더니
모든 종교가 찾는 이상향이 바로 이 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