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8, 2003

14일자 세미나 기록을 보고

오래된 글

제가 겨울성경학교 준비로 인해 참석하지 못해서 좀 죄송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합니다. 저번 모임부터 꼭 참석하기로 한 것처럼 이야기해 놓고선...^^ (그래도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1. '자유 의지'에 대한 생각...

저도 이것 때문에 중고등부 때부터 머리 빠게지게 고민했고, 지금도 어느 정도 고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제가 머리 빠게지게 고민하고 내린 결론은, "아우구스티누스나 칼빈은 우리만큼, 혹은 우리보다 똑똑하다"라는, 아주 평범한 결론이었슴다...ㅠㅠ 이게 무슨 말씀이냐 하면, 인간에게 선악을 택할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적어도, 사람에게 선한 것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말은 아니라는 겁니다(물론, 표현은 그렇게 합니다. 근데, 그들이 '선한 것'이라는 표현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간파해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나 칼빈이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긴 하지만, 상식적인 의미에서 '사람이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고 이야기한 것은 아니라는 게 확실합니다(예를 들면,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도와주기로 선택할 능력/의지가 없다는 식의 말이 아닙니다. 이게 기독교강요에도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파악해야 할 것은, 이들이 '선한 것'이라는 말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 즉, "선한 것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제가 파악하기로는, 좀 단순화시켜서, 이 선한 것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아우구스티누스나 칼빈이 의미하는 바의 요체는 '인간이 자기 의지(자력)으로 하나님(선한 것/분)을 선택할 수는 없다'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딴에 '의지를 발휘해서', '이성과 판단력을 사용해서' 선택한다고 선택했지만, 백이면 백 모두, 선택된 그 하나님은 '우상'이라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을 뿐더러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식/가르침(이게 바로 말씀, 즉 계시지요...)이 없이는 인간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이 생겨나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자유 의지'를 발휘해서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유 의지를 발휘해서는 참 하나님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건 참된 의미에서 '자유'가 아닙니다. '필연적으로' 우상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의지입니다. 선한 것 대신에 악한 것'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의지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에게 자유 의지란 없습니다.

여기서 논리적으로 자연스럽게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참'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나옵니다. Sola Scriptura, 성경만으로! 그럼, 성경이 말하는 요체가 뭐냐?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 이상이 기독교 강요 1권의 논리의 흐름이라고 저는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 앞에 나오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대한 장은 다음과 같은 논리의 흐름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창조주가 명백하다. 눈을 들어 인간과 세상을 보라. 2)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만물로써 당신의 능력과 계심을 충분히 보여주셨다. 보지 못한 것은 하나님 책임이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전적으로 무능하기 때문이다...(이 부분이 제가 위 단락에서 상술한 내용입니다...) 3) 그럼, 왜 인간이 무능할까? 타락해서 죄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우짜노?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

이 정도가 제가 파악한 칼빈이 제시하는 논리의 흐름입니다...

2. '성도의 견인'에 대한 생각

성도의 견인은 위에서 논박된 것을 바탕으로 생각해야 제대로 풀립니다. 즉, '인간이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논박된 후에야 성도의 견인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도의 견인은 번역이 좀 어렵게 되었는데, 우리말로 쉽게 하면, '(하나님이) 성도를 오래참아주심'이라고 하면 좋습니다. 즉, 하나님이 한번 찍고 난 뒤에는 좀 까불어도 봐주시면서 '찍은 것' 자체를 철회하지는 않으신다, 즉 호적에서 파내지는 않으신다는 것이 성도의 견인이 말하는 바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선택할 수 없다면? 당삼, 하나님이 인간을 선택하시지요... 인간이 하나님을 스스로 '제대로' 선택할 가능성은 제로이지만, 하나님이 당신께서 선택할 백성을 놓칠 가능성도 제로입니다. 이게 성도의 견인이 핵심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바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견인은 성도의 삶의 차원에서 이야기되기보다는, '하나님의 성품'의 차원에서 이야기되어야 하는 주제입니다. 즉, 성도의 견인을 성도가 죄를 지어도 하나님이 놓지 않으시나... 뭐 이런 맥락에서 이야기한다면 논의가 밑도 끝도 없어집니다...

아주 시스테믹하게 이야기를 한다면, 예수 믿는다 해놓고 심각한 죄를 짓고 사는 사람은 선택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야고보서의 논증으로도 지지됩니다. 믿음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나타납니다. 선택된 사람에게 따르는 표적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 그 믿음대로 사는 것입니다--이게 없으면 선택된 사람이 아니라고 보면 됩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신약 성경의 논법대로 하자면,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거짓말을 밥먹듯 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 형제를 미워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 자기에게 빚진 자를 탕감해 주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만약, 거짓말하고 형제를 미워하고 빚진 자를 탕감해 주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스테믹하게 모든 것을 정리해 버리기에는 삶이 아주 복잡다단합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사랑'과 '오래참음', '기다림' 등을 말씀합니다. 지금은 선택되지 않은 사람같이 보여도 긴 인생의 관점에서는 어떻게 될 지 모릅니다. 그리고 저 사람이 지금 형제를 그토록 미워하는 건 어쩌면 그토록 절박한 이유가 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거짓말을 저토록 밥먹듯이 하는 건 어쩌면 이때까지의 그렇게 살아온 습관을, 괴로워하면서도 못 끊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으로 형제를 대해야 합니다(물론, 타협과는 다릅니다...).

성도의 견인을 하나님의 사랑 표현 방식으로 받을 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감사가 나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