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글
허세/과격/미숙함 주의
누구나 더 큰 구조에 편입되기를 원하는 욕망이 있다. 사람은 부속품이 되기를 원하진 않지만 한 몸이 되기를 원한다. 자기의 경계와 틀과 한계를 무너뜨리고 더 큰 실체와 한 몸이 되기를 원한다.
그 중 가장 매력적인 대상이 바로 <신>이다. 동서고금 숱한 신들이 있어왔다. 신들이 어떠한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내용도 비슷하다. 그래서 어떤 신들은 차 포 다 떼고 <크다>, <무한하다> 뭐 이런 거만 남은 신들도 있다. 이런 신들은 사람들의 숱한 명상과 사색과 묵상을 거치고 <정금같이> 나온 신들이다. 신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또렷하고도 확실해지는 것은 나머지는 다 생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을 신이게 한 속성, 그건 열심히 더 파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가 많은 사람들은 <깊고도 넓은>, 현묘한 절대자를 계발해 내었다. 그런 후 자신들이 만든 신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자기도 <무한자>, <현묘자>, <존재 자체>, <우주>가 되었다.
우리는 "기독교적", "신앙적"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으면 불안해 한다. 내가 하는 행동, 내가 하는 말, 내가 하는 일들,,, 이 모든 것이 과연 <기독교적>인가... 이런 것들을 심각하게 고민하며 사는 것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의 징표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라. <기독교적>, <신앙적>이라는 말들이 노리는 피안이 무엇인가를. 열심히 노를 저어 닿으려고 하는 그 땅이 어디인가를.
우리에게는 자신의 존재와 행위를 정당화시키려는 욕망이 항상 존재한다. 이 욕망이 모든 개혁과 혁명의 근원이다. 신을 인정하지 않거나 배짱 두둑한 사람에게는 이 욕망은 두 방향으로 나타난다. 자신이 편입되고 싶은, 자기보다 더 큰 실체를 뜯어고치는 것, 그리고 자기를 거기에 던지는 것. 신을 인정하거나 소심한 사람은 처음 것을 생략한다. 신은 원래 정당화되어 있는 것이거나 기존 실체를 뜯어고치기보다는 순응하는 것이 속편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모든 사람에게는 <정명(正名)>에 대한 욕망이 존재한다.
우리는 이 욕망을 <기독교적>이라는 도장을 찍음으로 해결한다. 내가 닿고자 하는 그 땅은, 모든 물건에 "MADE IN GOD"이라는 품질보증 마크가 찍혀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 나는 내 등에 찍힌 도장을 뿌듯해하며 하나님이 쓰다듬는 내 뒷머리의 감미로운 감촉을 느낀다. "잘 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말을 들으며...
"기독교적/복음적"이라는 마크를 달고자 하는 우리는 겉보기에는 매우 신앙적이고 경건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신앙적이고 경건한> 패턴이 존재한다. 좀 보수적인 사람은 <개인 경건>에 치중하고 나름대로 진보적이다 싶으면 <총체적 신앙>을 구현하려 한다. 그러나 둘 다 <신앙적>, <기독교적/복음적>이라는 마크를 향한 열심에 있어서는 똑같다. 누가 더 <신앙적>인가. 이것이 우리의 초미의 관심사이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모든 행동을 <복음으로/성경으로> 재해석해내려 한다. 그래야 우리는 정당화(칭의[justify])된다. 정당화된 우리는 정당화되지 못한 <미개인(未開人)>들을 비난한다.
성경으로 만들어내는 숱한 정당화의 기준들 속에서 우리의 심령은 녹아난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성경에서는 전혀 의도하지 않은 <이것 저것> 사이에서 우리는 방황한다. 실상, 복음은 이러한 이것 저것들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고자 했는데... 복음이 자유케 하고 폐기처분한 숱한 율법들이 우리 사이에 다시 들어서 있다.
정당화(칭의/justify)하는 것은 율법이다. 모든 것은 율법이라는 말의 체계에 의해서 정당화된다. 이러저러한 행동과 존재는 어떤 말의 체계에 의해 <눈에 보이게> 마크가 찍힌다. 복음은 이런 율법들에 의한 칭의에다 코를 풀어버린다.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의 말들의 체계로 정당화된 모든 것이 불의하다. 우리끼리야 넌 의롭고 넌 불의하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는 의롭다하는 너 역시 불의하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로 대표되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으로 자기를 정당화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자기들을 정당화시키고 <신앙적>이라는 마크를 찍어주는 <품질관리협회>, <메이커제조업체>가 되어 버렸다. 실상, 율법은 지켜서 의로워지라고 주신 말의 체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언으로서의 말의 체계인 것을(롬 3:21).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의 삶에 나름대로 <적용>할 수 있는 <의(義)>를 만들어주는 공장이 아니다. <딱 하나의> 의만 이야기하는 것이 성경이다―하나님의 의. 하나님이 무엇을 옳게 여기시는가, 이것만 가르쳐 준다. 하나님이 옳게 여기시는 바는 손에 잡히지 않는 행동들이나, 무슨 신념 체계들이 아니다. 바로 당신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의다. 그저 <예수 안에> 있음, <그리스도로 덧입음>, <그리스도와 연합함, 한 몸 됨>으로 그대는 충분히 의롭다. 그리고 이런 칭의는 그대의 행동이 눈꼽만큼도 필요없다. 그대는 그대의 정당화되는 과정에서 털손을 떼야 한다. 이것을 긍정적으로 말하면, 그대는 <공짜로> 칭의된다―이게 <은혜>의 본질이다. 만유는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라야 심판을 면한다.
성경을 온갖 잡일들에 소비하려는 그대에게 화 있을진저! 그대가 생각하는 일들이 얼마나 숭고하고 얼마나 적실하고 얼마나 급박한 일인가에는 성경은 도대체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대가 생각하는 진실된 일이 그대가 주님과 날마다 매일의 삶 속에서 동행하는 것일 수 있다. 그대가 생각하는 절실한 일이 부자가 되는 일일 수 있다. 그대가 생각하는 숭고한 일이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일 수 있다. 그대가 생각하는 급박한 일이 이 나라를 개혁/혁명하는 일일 수 있다―성경을 가지고 이 모든 일들을 정당화하려 하지 말라! 그러는 순간 그대는 서기관이자 바리새인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이여!"
평온한 삶을 사는 방법은 세상 도처에 널려 있다. 부자가 되는 방법도 널려 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것도 굳이 복음 아니라도 된다. 개혁/혁명하는 일은 예수님보다 마르크스가 더 잘 썰을 풀어놓았다. 그런 것들을 이용하라. 성경을 이용하여 <기독교적>이라는, <하나님의 재가(裁可)>를 받으려는 것은 꿈도 꾸지 마라. 하나님은 그런 것을 재가하지 않으신다. 오직 하나님의 용납을 받는 것은 당신의 아들이다. 성경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지 않다. 성경 밖에도 좋은 게 많고 성경 밖에서 이야기해야 할 건 성경 밖에서 이야기해야 한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피조물은 모두 기도와 말씀으로 거룩하여진다. 하나님 재가를 받아 하나님 비슷해지려는, 하나님과 <섞이려는>, <권력적> 성경 읽기를 내다버리고 그대가 죄인임을 겸손히 시인하라! 예수 없이 그대는 한낱 흙이요, 하나님 심판의 대상일 뿐이다! 하나님 눈에는 그대 자체가 보이는 게 아니라, 그대가 <아들과 어떤 관계인가>만 보일 뿐이다. 그대가 아들과 한 몸된 아들 며느리일 때, 아들의 동생일 때 그대는 하나님 집안 사람이 된다.
교회는 세상의 모든 의로움들을 갖다 버린 사람들이 하나님의 한 의 안에서 하나된 모임이다. 그러므로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 나와 그를 갈라놓고 서로에게 살의를 품게 했던 모든 율법들이 예수 안에서 무너진 곳이 교회다. 그러므로 유대인도 이방인도, 미국놈도 북한놈도, 노동자도 자본가도, 남자도 여자도, 종도 주인도, 자본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진보도 보수도, 부자도 가난뱅이도, 배운놈도 못배운놈도, 술먹는 놈도 담배피우는 놈도, 미니스커트 입는 여자도 머리에 물들이고 오는 애도 모두 하나다. 자기가 가진 모든 의를 포기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만 하나님 앞에서 옳다는 것을 증거해야 하는 것을 요구받는 곳이 교회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자꾸 다른 의들을 세워 나가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당짓는 것"이다―알다시피,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다른 의를 세우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한 의를 모르고 있다는 표징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미국놈은 미국놈으로 남고 북한놈은 북한놈으로 진보는 진보로, 보수는 보수로 남는다. 이것을 포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형제된> 자들에게는 진보/부자/배운자... 가 아니라 <그의 형제>로 나타나야 한다. 이것을 교회에서는 요구받고 있다.]
교회는 교회고 세상은 세상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죄인은 죄인이다. 섞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