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6, 2004

루터 묵상(1)

오래된 글

<스콜라 신학 논박> 중
제 40항> 우리는 의로운 행위를 함으로써 의롭게 되는 게 아니라, 의롭게 될 때 의로운 행위를 한다.
제 41항> 아리스토텔레스 윤리는 모두 은혜의 제일 큰 원수다.
제 42항> 최고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이 가톨릭 교의[catholic doctrine]에 거슬리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류다.
제 76항> 율법의 어떤 행위가 하나님의 은혜 없이 행해진다면, 외면적으로 선해 보여도 내면적으로는 죄다.
제 79항> 화 있을진저, 율법의 행위를 행하는 모든 자여.
제 80항>복 있을진저, 하나님 은혜의 행위를 행하는 모든 자여.

요즘 들어 루터가 한 이야기들을 자주 읽게 된다. 우리가 가진 "종교개혁 신앙"이라는 것은 21세기를 맞은 지금 구닥다리가 되었는가. [나는 "개혁신앙"을 "칼빈주의"에 국한시키는 것을 반대한다. 루터부터 시작해서 "개혁신앙"을 따져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혁신앙"은 그야말로 "종교개혁신앙"이다.]

"행함 없는 믿음"에 대한 반성이 크게 일어나고 있는 요즘, 이러한 개혁신앙이 홀대받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심지어, 종교 개혁의 모토 중 하나인 "오직 믿음으로!"까지 의심받고 있는 실정이다. 당연히 행해야 한다. 이건 기본이다. 그리고 교회가 세상의 기준에도 미달하는 윤리 수준을 갖고 있다는 것은 분명 통탄할 만한 일이다. 이것을 부인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 개혁이, 특히 루터가 명확하게 분별해서 그어놓은 선까지 넘어가서는 안 된다.

교회는 의로워야 한다. 교회는 선해야 한다. 교회는 거룩해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물어야 한다, 교회의 의로움, 선함, 거룩함은 어떻게 판가름나고 분별되는가를.

우리는 교회의 의로움, 선함, 거룩함 등을 너무 쉽게 교회 밖의 의로움, 선함, 거룩함과 동일시한다. 그러나 루터에 따르면 일반적인 윤리 수준 이상의 삶을 산다고 해서 그 자체로 "기독교적"인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인은 불신자보다 더 윤리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라는 말은 한편으론 맞지만 한편으론 틀렸다. 기독교인은 자신의 "탁월함"으로 자신의 성도 됨을 나타내지 않는다.

행함으로는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 루터의 입장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주 중요한 종교개혁의 입장이기도 하다. 사람은 선행을 함으로써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사람이 된 후에야 선행을 한다.

여기서 말하는 "선한 사람"은 도덕적 기준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선한 사람이다. 선행 역시 마찬가지의 맥락에 있다. 깨놓고 말하면, 하나님이 의롭다고 봐주면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선행을 하고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도 하나님이 의롭다 봐주지 않으면 선한 사람일 수 없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선행을 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그런데 루터는 한 걸음 더 나간다. 만약 사람 스스로 선하게 될 수 없다면 하나님과 관계를 제대로 트는 것도 사람 스스로 할 수 없는 거 아닌가. 하나님께서 먼저 사람에게 다가오셔서 사람을 바꾸신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선행해야 사람이 바뀌는 것이다. 은혜가 임했음을 나타내는 표지가 바로 "자기 사랑"에서 "하나님 사랑"으로 바뀌는 것이다. 선행으로 자기 의를 나타내려는 모든 시도를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내부에서 선한 것이 나온다는 모든 주장은 오류다.

이렇게 보면, "믿지 않음"이 의와 죄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아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하는 행동은 모두 죄다. 그가 하는 이웃 사랑도, 그가 하는 구제도, 그가 하는 사회 개혁도 모두 죄인 것이다. "그 자체로" 선한 덕목, 혹은 행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김 받는 것"과 "세상에서 의롭다 여김 받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세상 의로움의 기준을 가지고 스스로를 의로운 존재로 드러내려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을 흐려놓는 것이다. 여하한 활동(행위)으로 세상에서 의롭다 인정받으려는 욕심이 있는 교회는 언젠가 세상이 된다.

[보론: 칼빈은 "선한 사람"과 "선한 행위"를 분리해서 생각한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김 받지 못하는 불신자라도 그가 한 행위는 "일반적인 기준에서" 선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선함은 그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런 선한 것들을 일러 "일반 은총"이라 했다. 비록 불신자에게서 일반 은총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이것은 그의 선행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불신자는 하나님 앞에 내놓을 선행이 없다! 이건 루터의 논리보다 좀더 엄밀한 논리다. 어쨌든 핵심은 "불신자 고유의 것이라 할 만한 선행은 없다"는 것이고 이것은 루터의 입장과 일맥상통한다. (일부 문화 칼빈주의자들이 해석하는 식의 일반은총론은 일반은총을 너무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재고해보아야 한다.)]